지난 3월 수제맥주 스타트업 A사는 서울 강남 일대에 맥주와 햄버거 등을 배달하는 서비스를 시작했다. 한국식 수제맥주로 인기를 얻은 A사가 맥주 배달 서비스에 나서자 소비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스마트폰 클릭 한 번으로 고급 수제맥주를 배달하는 O2O(온라인ᐧ오프라인 연계) 혁신 사례로도 언급됐다.

하지만 이 회사는 배달을 시작한지 두 달만인 지난 5월, 해당 서비스를 접었다. 국세청으로부터 음식이 아닌 주류를 주로 배달하는 서비스는 주류고시를 위반한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국세청은 “생맥주를 페트병에 담아 판매하는 것은 주세법, 식품위생법 위반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결국 이 회사는 야심차게 준비했던 배달 서비스를 중단하면서 1억원에 가까운 손해를 봤다.

또 다른 배송 스타트업 B사는 올 3월부터 수제맥주 정기배송 서비스를 시작했다. 간단한 안줏거리와 함께 소비자들이 쉽게 구할 수 없는 희소한 수제맥주 4병을 골라 배송해주는 서비스다. 대중에 잘 알려지지 않던 국산ᐧ수입산 수제맥주를 발굴하고, 이런 맥주에 대한 전문적 정보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B사의 서비스 역시 출시 직후부터 호응을 얻었다.

하지만 B사도 3개월만에 비즈니스모델을 완전히 재검토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B사는 제조사로부터 맥주와 과일샐러드, 건조과일 등 안줏거리를 공급받아 소비자에게 배송하는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오는 7월부터 국세청이 ‘음식점에서 직접 조리한 음식만 배달하라’고 주류고시의 조문을 바꿀 예정이기 때문이다.

법 테두리 안에서 시작한 사업... 국세청 "취지와 다르다"

지난해 8월 국세청은 음식을 주문받았을 때 주류를 함께 배달하고, 음식점에서 파는 맥주를 외부로 반출(테이크아웃)하는 것을 합법화한다는 내용의 주류고시 개정안을 발표했다. 전화로 치킨이나 짜장면 배달시 맥주, 고량주, 소주를 같이 시키는 게 일상화됐음에도 ‘불법’으로 간주되고 있는 모순점을 개선해 배달음식 자영업자들과 국민을 범법자로 만들지 않겠다는 것이 고시 개정의 취지였다.

고시 개정으로 야구장의 ‘맥주보이’도 합법화됐고 짜장면과 치킨을 시킬 때 술을 주문하는 것도 합법화됐다. 이런 수요를 바탕으로 여러 수제맥주업체들도 맥주 당일 배달, 맥주 테이크아웃, 맥주 배송 등 기존에 없던 서비스를 내놓기 시작했다. 그러나 서비스를 시작한지 불과 몇개월만에 규제에 막혀 발목이 잡혔다.

국세청 관계자는 “짜장면이나 치킨, 족발을 시킬 때 주류를 추가하는 것을 합법화하자는 게 고시 개정안의 취지”라며 “음식이 주가 되어야 하고 술은 부수가 되어야 하는데 (B사 같은 업체들이) 법의 취지를 잘못 이해한 것 같다”고 말했다.

미국, 캐나다, 영국에선 주류 정기배송과 배달 서비스가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다.

국세청은 오는 7월 1일 주류고시 및 주세규정사무처리 개정안을 발표하고 “전화로 주문받은 음식을 주류와 함께 배달할 수 있다”는 조문을 “전화로 주문받아 ‘직접 조리한’ 음식에 주류는 ‘부수하여’ 배달할 수 있다”고 개정할 방침이다. 즉 배달시 술이 ‘부수’가 되지 않으면 불법이란 얘기다.

7월부터 개정될 고시 때문에 스타트업 B사는 사업장 안에 음식 조리 시설을 마련하고 셰프를 찾는 등 사업 모델 자체를 바꾸고 있다. B사 관계자는 “국내에서 없던 서비스를 출시한 이후 사용자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보면서, 사람들이 기다려왔던 서비스임을 느꼈다”며 “작년 고시 개정에 맞게 법 테두리 내에서 스타트업의 혁신 DNA가 적용된 새로운 서비스 모델을 만들었는데 부정적으로 비쳐 안타깝다”고 밝혔다.

해외도 '수제맥주 배송' 트렌드..."소비자 원하는 혁신 서비스 짓밟아선 안돼"

스타트 업계에선 소비자들이 원하는 서비스를 도입한 참신한 아이디어가 나와도 법규정에 정한 것만 할 수 있는 우리나라의 ‘포지티브 규제’ 때문에 사업을 성장시키는 것이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내에선 수제맥주 시장이 급성장하고 오프라인과 온라인을 연계하는 배달, 배송 분야 혁신 사례가 많이 나오고 있어 ‘수제맥주 배송’도 규제만 낮춘다면 성장 가능성이 높은 시장으로 여겨진다. 미국은 전체 맥주시장 중 수제맥주의 비율이 13%를 차지하는데, 한국은 맥주시장(5조원) 가운데 수제맥주가 차지하는 것은 1% 정도에 그친다. 수제맥주 비중이 10%까지만 올라가도 5000억원 규모의 시장이 형성된다.

임정욱 스타트업얼라이언스 센터장은 “일상의 불편함을 해소해주고, 소비자들의 니즈를 파고드는 서비스가 기존 산업의 틀을 깨고 혁신을 가져오기 마련이다”라며 “지나치게 세세한 규제로 스타트업의 신사업들을 막는 것은 혁신의 싹을 밟아버리는 것과 다름없다”고 말했다.

임 센터장은 “어느 분야이든 소비자가 원하는 혁신적인 서비스가 나오면 그 업체와 시장이 성장하는 것을 두고 보면서 정책과 규제를 맞춰 가야지, 새로운 시도를 무조건 규제하는 환경에선 혁신업체가 나올 수 없다”고 말했다.

미국 보스턴에서 2012년 창립된 ‘드리즐리’는 미국 대도시에서 주류를 배송한다.

해외에선 맥주 배달이나 배송과 관련한 규제에서 자유로운 스타트업들이 수제맥주와 희귀 와인 배송 서비스를 하고 있다. 북미 지역의 대표적인 업체는 ‘드리즐리(Drizly)’다. 2012년 창립된 이 스타트업은 보스턴, 로스앤젤레스, 뉴욕, 시카고 같은 대도시에서 수제 맥주와 희귀 와인을 배송하고 있다. 지금까지 드리즐리는 벤처캐피탈로부터 3500만달러(400억원)를 투자받았다.

세계적인 유통기업 아마존도 2015년 미국 시애틀 지역에서 1시간 내 맥주, 와인 등 주류를 배달해주는 서비스를 시작했다. 2012년 설립된 영국 스타트업 ‘어니스트브루’는 유럽과 미국, 일본 등 전세계 100여개 수제맥주 브루어리(양조장)와 손잡고 매주 가입자에게 새로운 수제맥주를 배송해주고 있다. 이 업체는 영국 언론 가디언지에 의해 2015년 ‘올해의 혁신 스타트업’에 선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