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중린(王中林) 중국과학원 베이징 나노 에너지 및 시스템 연구소 교수 연구팀은 지난 4월 걷기만 해도 충전이 되는 초경량 종이 배터리를 개발했다. 신체가 움직일 때 발생하는 정전기나 마찰전기를 이용해 전기에너지를 저장하는 방식이다. 종이로 만든 격자 모양의 구조체 안쪽 면에는 마찰전기를 발생시키는 불화에틸렌프로필렌(FEP) 필름과 전극 역할의 금을, 바깥쪽 면에는 축전기의 양극을 이루는 흑연과 금을 입혔다. 격자가 신체의 움직임에 따라 눌렸다 펴지기를 반복하면 마찰 전기가 발생하면서 충전이 되는 방식이다.

조용훈 한국과학기술원(KAIST) 물리학과 교수 연구팀은 지난해말 ‘종이 반도체’를 선보였다. 정밀 반도체 회로를 종이로 만든 칩 위에 얇게 옮긴 것이다. 짧은 기간 사용하고 버리는 전자제품에 쓰일 수 있고 기존의 반도체 칩보다 제작 비용이 적게 든다.

책, 신문, 화장지, 포장재 등 우리 일상에 쓰이던 종이가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그 영역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기능성 특수 종이가 개발되고, 첨단 산업의 핵심 소재로도 활발히 연구 개발되고 있다.

왕중린 중국과학원 베이징 나노 에너지 및 시스템 연구소 교수 연구팀이 개발한 걷기만 해도 충전이 되는 종이 배터리(왼쪽)와 조용훈 KAIST 물리학과 교수 연구팀이 개발한 종이 위에서 작동하는 초소형 반도체 레이저 가상도.

◆ 경제성·성형성 우수한 친환경 종이 배터리…‘리튬이온 배터리 비켜’

종이 배터리는 탄소나노튜브(6각형 고리로 연결된 탄소들이 긴 대롱 모양을 이루는 지름 1나노미터 크기의 미세한 분자)를 셀룰로오스 종이와 결합해 만든 얇고 유연한 에너지 생산 및 저장 장치다. 장기간 안정적인 전력을 생산할 수 있고 독성이 없으며 저렴한 가격에 만들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구부리고 비틀고 접는 것은 물론 필요한 모양으로 잘라도 본연의 성질과 효율성을 유지해 전자 및 의료기기, 웨어러블 기기, 하이브리드 자동차 등에 전력을 공급할 차세대 배터리로 주목받고 있다.

종이 배터리 개발은 10년 전에 시작됐다. 미국 렌셀러 폴리테크닉 대학(RPI) 연구진이 2007년 개발한 최초의 종이 배터리는 나노기술을 이용해 일반 리튬이온 배터리의 내용물을 셀룰로오스 종이에 재포장한 것으로, 전등 한 개를 가동할 수 있을 정도의 전력(2.1V)을 냈다. 무게와 감촉, 겉모습은 종이와 동일했으며, 크기는 엄지와 검지 두 손가락으로 겨우 집을 만큼 작았다.

스탠포드 대학 포스닥(박사후과정) 연구팀은 2009년 일반 종이의 표면에 나노튜브로 만들어진 특수 잉크를 묻히는 방식을 도입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배터리는 기존 리튬이온 배터리보다 10배나 많은 4만회의 충방전을 할 수 있다. 같은해 스웨덴 웁살라대 연구진은 소금물에 적신 종이를 잘게 잘라 여러 겹으로 쌓으면 상당한 에너지를 저장할 수 있다는 원리를 이용해 1V의 전력을 저장할 수 있는 일회용 배터리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이상영 울산과학기술원 에너지 및 화학공학부 팀이 개발한 기술로 잉크젯 프린터로 종이 위에 배터리를 출력하는 모습. 출력된 배터리 위에는 이를 활용한 온도 감지컵이 놓여있다.

잉크젯 프린터로 종이 위에 배터리를 출력하는 기술도 나왔다. 휴대용 배터리의 모든 구성요소를 잉크 형태로 만들고 종이 위에 잉크가 번지거나 이탈하는 현상을 막기 위해 나노 크기의 셀룰로오스를 썼다. 출력한 배터리는 1만번 충방전을 반복해도 용량이 줄지 않았고, 150℃ 고온에서도 그 특성을 그대로 유지했다. 또 1000번을 구부려도 성능에 변화가 없었다. 이상영 울산과학기술원(UNIST) 에너지 및 화학공학부 교수 팀이 이 기술 개발을 주도했다. 연구팀은 이 기술을 이용해 LED 램프를 켤 수 있는 종이 지도와 물 온도를 감지해 온도에 따라 다른 색의 등불을 켜는 유리컵 등을 제작했다.

삼성전자와 LG전자가 이 기술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배터리의 유연성과 가공도를 강조하는 웨어러블 기기 시장은 2020년 15조원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친환경 자동차로 주목받고 있는 전기 자동차의 리튬이온 배터리 시장도 2020년 15조8000억원으로 연평균 20%씩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소니는 종이 조각을 물과 셀룰로오스로 분해해 전력을 생산하는 바이오 배터리를 소개했으며 미국 빙엄턴 뉴욕주립대의 최석현 교수는 박테리아를 전력원으로 일회용 전자기기를 작동할 수 있는 종이 배터리를 개발하기도 했다.

◆ 종이로 당뇨·치매 진단…수은 오염 확인도

종이는 의료진단기기들의 신소재로도 각광받는다. 신관우 서강대학교 교수팀은 지난 4월 태국·덴마크 등 해외연구진과 공동연구를 통해 기존의 실리콘과 같은 기판을 사용하지 않고 종이와 프린팅 기술을 이용해 만든 종이전자진단칩을 개발했다.

이 칩은 혈당 분석과 알츠하이머 질병에서 나타나는 뇌 전달물질, 신장 이상에 의한 요산의 농도를 동시에 분석할 수 있다. 의료 시설에서 실시간 원격제어가 가능한 ICT 연계형 현장 진단기기 또는 개인 맞춤형 휴대형 장비로 활용될 예정이다. 연구팀은 해당 기술에 대해 국내 특허와 미국 특허 출원을 완료한 상태다.

종이를 이용해 음용수 및 식품 속 유해물질 검출도 가능하다.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 소속 바이오융합분석본부 생물재난연구팀은 지난 13일 종이칩과 금 나노입자를 이용해 10분 안에 수은 오염 여부를 진단할 수 있는 고감도 현장검출키트를 공개했다. 육안으로 색을 식별해 수은의 유무를 판단할 수 있고, 스마트폰 카메라를 이용한 측정값도 산출할 수 있다.

한 식품업계 관계자는 “식품·유통업체들은 대부분 연구소를 두고 식품 안전성을 관리하고 있다”며 “소비자들이 종이 칩 등을 이용해 직접 안정성을 확인할 수 있다면 악성 유언비어나 루머가 생길 일도 적어지고, 생기더라도 업체들이 안전성을 입증하기 쉬워질 것”이라고 했다. 식품업계에 따르면 식품안전 논란이 불거질 경우 최소 6개월간 브랜드 이미지 훼손, 매출 감소 등 직·간접적인 피해로 이어진다.

국내 제지업계도 다양한 종이 활용법 찾기에 나섰다. 벽지 전문시공업체 웰빙그린은 특수제조한 종이에 수용성 용제와 옥가루, 해조류 등을 첨가한 액체벽지를 개발했다. 전주페이퍼는 자사 발전소를 열병합 발전소로 개조해 상업 판매를 시작했다. 종이 제작 과정에서 발생하는 폐목재, 폐지 등을 태워서 생산한 전력을 한국전력공사에 판매하는 식이다. 이상훈 한국제지연합회 회장(현 한솔제지 사장)은 지난 16일 ‘제 1회 종이의 날 기념식’에서 “신제품 및 신시장 개척 등은 지속성장 기반을 구축하는 출발점”이라며 “IT의 대척점에 종이가 있다는 기존의 사고에서 벗어나 융복합화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