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자물리학 연구에서 신소재 개발, 암 치료까지 과학의 거의 전 분야에 걸쳐 도움을 줄 거대과학 시설이 국내에서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기초과학연구원(IBS) 중이온가속기건설구축사업단은 지난 4~5월 한국과학기술원(KAIST) 문지캠퍼스 시험시설에서 중(重)이온 가속기의 핵심 장비에 대한 성능시험에서 합격 판정을 받았다고 밝혔다. 한국이 2021년 완공을 목표로 개발 중인 한국형 중이온가속기 '라온(RAON)'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확인한 것이다. 중이온 가속기 핵심 장치를 개발하고 성능시험까지 마친 것은 미국·캐나다·프랑스·독일·이탈리아·중국·일본에 이어 8번째다. 전문가들은 "한국이 2011년부터 1조4000억원을 투입해 야심 차게 시작한 대규모 국책사업이 반환점을 돌았다"고 평가했다.

세계 최대 규모의 중이온 가속기 '라온'

중이온은 수소보다 무거운 원자에서 전자가 빠져 양의 전기를 갖는 이온(전하를 띤 입자)을 말한다. 중이온 가속기는 이렇게 만들어진 중이온에 강한 전기를 가해 빛의 속도인 초속 30만㎞에 가깝게 가속(加速)하는 장치다. 중이온이 가속기를 돌다가 우라늄과 같은 무거운 원소와 충돌하면 핵반응이 일어나는데, 이때 자연에 없는 새로운 동위원소(원자번호는 같지만 질량이 다른 원소)가 나온다.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 대형입자가속기(LHC)의 모습. 한국형 중이온 가속기 ‘라온’이 완공되면 CERN의 입자가속기처럼 우주의 기원을 규명하는 기초연구부터 신소재 개발, 암 치료 연구까지 폭넓은 분야에 활용될 수 있다.

희귀 동위원소는 물질의 생성원리를 찾는 기초연구에 도움을 준다. 중이온 가속기 연구는 이미 10여 명의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중이온 가속기에서 만든 새로운 동위원소는 신소재의 원료가 될 수도 있다. 암세포만 공격하는 동위원소도 만들 수 있어 의료분야에도 도움이 된다.

중이온 가속기는 크게 일반 원자를 중이온으로 바꾸는 '이온발생장치'와 중이온을 빠르게 가속하는 '가속기', 빠른 중이온을 다른 연구에 사용하는 '희귀동위원소 빔 발생장치'로 나뉜다. 자연 상태의 원자는 전기적으로 중성이기 때문에 아무리 전기를 가해도 가속시키기 어렵다. 대신 원자에서 전자를 제거한 뒤 전기를 띠게 하면 가속이 수월해진다. 같은 전기로 밀거나 다른 전기로 당기는 식으로 가속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기를 띤 중이온은 총 5개 가속장치를 단계별로 거치며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높아진다.

중이온 가속에서 가장 중요한 건 온도다. 아무리 작은 입자라도 광속에 가깝게 속도를 끌어올리려면 큰 전기 에너지가 필요한데 상온에서는 전기 저항이 크기 때문에 전력 소모가 많다. 이 때문에 전 세계 연구소에서는 전기 저항이 '0'에 가까워지는 저온 초전도 상태에서 중이온을 가속한다. 이번에 성능 시험에 성공한 장치가 바로 초전도 상태에서 중이온을 빠르게 끌어올리는 '초전도 가속기'다. 첫 단계 가속기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영하 수십 도에서 영하 100도 이하의 초전도 상태에서 가속이 이뤄진다. 초전도 상태에서는 중이온 가속에 들어가는 전력 효율이 상온에서보다 100배가량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정회천 IBS 중이온가속기건설구축사업단 가속장치팀장은 "라온에서 나오는 중이온 빔의 출력은 현재 전 세계에서 운영되는 중이온 가속기 시설 중 가장 높은 수준"이라며 "가속기의 총연장도 500m로 세계 최대 규모"라고 말했다.

◇다음 달부터 가속기 건설 시작, 2021년 완공 목표

중이온 가속기 라온 구축 사업은 아직 갈 길이 멀다. 핵심 장비인 '초전도 가속장치' 4개 중 하나에 대한 성능시험을 마친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실제 가속기에 들어갈 가속장치들을 만들어야 한다. 정회천 팀장은 "초전도 가속장치들의 기본 구조가 비슷하기 때문에 원천기술이 확보된 만큼 다른 장치 제작도 훨씬 빠르게 이뤄질 수 있다"고 말했다.

중이온 가속기 라온은 대전 과학비즈니스벨트 신동지구 내 95만2000㎡ 부지에 지하 2층∼지상 3층, 14개 동 규모로 세워진다. 다음 달 건물 공사에 들어갈 예정이다. 정순찬 중이온가속기건설구축사업단장은 "한때 입지 논란으로 사업이 미뤄지기도 했지만 이번 성능 시험 성공으로 목표인 2021년 완공 가능성이 커졌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