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 미국 바이오젠의 척수성 근위축(근육이 손상되는 신경 질환) 치료제가 유럽 판매 승인을 받자 국내 바이오기업 파미셀이 활짝 웃었다. 바이오젠 제품이 유럽에서 선전하면 치료제 원료를 공급하는 파미셀의 매출도 덩달아 올라가기 때문이다. 이 업체는 최근 원료 수출이 늘면서 울산에 새 공장도 짓기 시작했다. 올해 말 완공되면 파미셀의 원료 생산량은 3배 이상으로 늘어난다.

최근 국내 제약사들의 의약품 제조 기술이 세계적으로 인정받으면서 원료 의약품(완제 의약품 제조에 사용하는 원재료)의 해외 수출이 늘고 있다. 사진은 에스티팜 반월 공장에서 직원이 원료 의약품 생산 설비를 점검하는 모습.

원료 의약품이 제약업계의 새로운 먹거리로 떠오르고 있다. 내수시장이 침체하고 R&D(연구·개발) 비용 증가로 신약 개발 문턱이 높아지자 제약기업들이 원료 의약품 수출에서 활로를 찾고 있다. 원료 의약품은 완제 의약품을 만들 때 사용하는 원재료를 말한다. 성분이 복잡하지 않아 신약보다 연구·개발에 평균 3분의 1 정도 시간이 덜 걸리고 비용도 상대적으로 적게 든다. 한국의약품수출입협회와 제약업계에 따르면 원료 의약품 수출 규모는 2014년 11억6955만달러(약 1조3000억원)에서 작년 13억달러(약 1조4600억원·추정치)로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제약 기업 매출의 효자 노릇

그동안 국내에서 원료 의약품은 '돈이 안 된다'는 이유로 신약이나 제네릭(복제약)에 비해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하지만 최근 글로벌 기업들이 신약 개발에만 집중하고 원료 생산은 의약품 위탁 생산 기업(CMO)에 맡기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원료 수출에 뛰어든 국내 기업이 늘기 시작했다. '대박'이 나는 글로벌 기업의 신약이 늘면서 원료 의약품은 국내 기업 매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효자'로 자리 잡았다.

유한양행은 올 1분기 매출이 전년 같은 기간보다 27.4% 오른 3494억원을 기록했다. 원료 의약품 수출이 전년 동기 대비 168.3% 늘어난 742억원을 기록한 덕분이다. 다국적제약사 길리어드에 C형 간염 치료제인 '앱클루사'의 원료를 납품한 게 매출 증가로 이어진 것. 유한양행은 작년 완공한 화성 2공장을 본격 가동하며 원료 의약품 수출 비중을 지난해 전체 매출의 10%에서 올해 21%로 확대할 계획이다. 한 제약업계 관계자는 "유한양행이 2015년 한미약품에 내줬던 업계 1위 자리를 되찾는 과정에서도 원료 의약품 매출 증가가 큰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종근당바이오는 수출 시장을 미국·동남아·중국 등으로 넓히면서 지난해 전체 매출 1130억원 중 81%인 913억원을 원료 의약품 수출로 벌어들였다. 항생제 원료를 생산하는 경보제약의 지난해 원료 의약품 수출액은 853억원으로 매출(1867억원)의 46%를 차지한다.

한국 제약 기업들이 원료 의약품 시장에서 약진하는 것은 신약 연구를 통해 세계 수준의 화학 합성 기술을 축적한 덕분이다. 정부에서도 2000년대 중반부터 제약 수출 품목 다양화를 위해 원료 의약품 수출 기업 지원을 확대하고 있다. 이재국 한국제약바이오협회 상무는 "한국 기업은 미국·유럽의 GMP(우수 의약품 제조 기준) 인증을 받은 원료 생산 시설을 갖추는 등 선진국에 뒤지지 않는 생산 시설과 품질 관리로 원료 의약품 시장의 다크호스로 떠오르고 있다"고 말했다.

원료 의약품 전문 기업 강세

원료 의약품을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기업들도 수출 증대로 몸집을 키우고 있다. 동아쏘시오홀딩스 계열사인 에스티팜은 간염 치료제 원료 수출 증가로 올 1분기 매출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54.8% 오른 478억원을 기록했다. 지난달엔 영국 미나테라퓨틱스와 113만달러(약 13억원) 규모 간암 치료제 원료 의약품 공급 계약도 체결했다. 현재 330억원을 들여 짓고 있는 반월 공장이 2019년 완성되면 에스티팜은 간염·간암 치료제 원료 생산량에서 세계 3위로 올라선다.

SK 자회사인 SK바이오텍화이자·노바티스와 같은 해외 제약사에 원료를 공급하고 있다. 이 회사는 영하의 온도에서 고순도 원료를 뽑아내는 '저온연속공정' 기술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SK가 정유 산업을 통해 쌓은 화학 합성 기술을 원료 의약품 생산에 활용한 것이다. SK바이오텍은 16만L인 세종 공장의 연 생산 규모를 2020년 80만L까지 키워 세계 10대 CMO에 진입한다는 목표다. 권오현 한국의약품수출입협회 수출진흥팀장은 "해외 제약사들이 원하는 원료 의약품 기준이 점점 까다로워지고 있다"면서 "인도 등 경쟁국에 비해 기술력이 뛰어난 한국 기업은 더 유리한 상황"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