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편식 시장이 뜨겁다. 과거 인스턴트 음식으로 불리던 간편식은 다양한 조리 기법과 최첨단 포장 기술로 맛을 살리고 물류 혁신으로 방부제 사용을 줄여 시간에 쫓기는 가정의 식탁을 공습하고 있다. 식품업계는 물론 유통업계도 급성장하는 간편식 시장을 잡기 위해 식품연구소를 만들고 수도권 인근에 물류센터를 짓는 등 사활을 걸고 있다. 조선비즈가 간편식 시장의 현황과 해외 사례, 문제점 등을 취재했다. [편집자주]

서울 동작구 상도동에 거주하는 맞벌이 가정 윤형식 씨(34) 부부는 일주일에 한두 번만 집에서 함께 식사하지만, 그때마다 진수성찬을 차린다. 지난 11일엔 지중해가 원산인 렌틸콩과 강원도 대관령 곤드레나물을 얹힌 밥에다 서대문 인근 유명 한식당의 김치찜, 미슐랭 가이드에서 별을 받은 큰기와집의 간장게장으로 주말 저녁을 즐겼다. 식사를 끝낸 뒤 두 사람은 계피 호떡을 디저트로 나눠 먹었다.

흡사 고급 한식 전문점을 떠올리게 하는 성찬이지만, 윤씨 부부는 음식을 데우는 것을 제외하면 요리에 아무런 공을 들이지 않았다. 밥과 반찬이 모두 가정간편식(HMR·Home Meal Replacement)이었기 때문이다. 이마트 피코크, 배민프레시 등에서 주문해 음식을 데웠을 뿐이다. 윤 씨의 아내 김민정(33) 씨는 “남편과 식사를 하고 싶긴 하지만, 그렇다고 힘들게 일하고 돌아와 요리하고 싶진 않다”면서 “시켜먹는 것도 질려 이제는 주로 간편식을 먹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의 한 대형마트에서 소비자가 가정간편식(HMR)을 고르고 있다.

간편식이 식품업계의 주력 시장으로 떠오르고 있다.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지난해 간편식 시장 규모는 2조3000억원으로 5년 전인 2011년에 비해 3배 이상 성장했을 것으로 추산된다. 1인 가구와 맞벌이 가정 증가 등으로 간편식 수요는 빠르게 확대되고 있다. 이에 관련 기업들은 다수의 요리사(셰프)를 채용해 식품개발연구소를 만들거나 빠른 배송을 위해 서울 지역내 물류센터나 공장을 신설하고 있다. 농식품부는 올해 간편식 시장 규모를 3조원 가량으로 추정한다.

◆ ‘싸고 빠른 한끼’에서 ‘집에서 즐기는 레스토랑급 특식’으로 탈바꿈

12일 식품업계에 따르면 간편식 종류는 3000~5000품목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마트의 피코크가 1500종으로 가장 많고, CJ제일제당과 오뚜기, 동원, 롯데, 대상, 아워홈 등 주요 식품회사가 수십, 수백 종씩을 갖추고 있다. 각 사가 간편식의 정의를 조금씩 달리 내리고 있어 정확한 비교는 어려운 상황이다.

간편식은 조리 간편식과 반조리 간편식, 바로 먹는 신선간편식 등으로 구분한다. 라면류는 제외된다. 우리나라처럼 간편식이 성장하고 있는 미국 등 선진국의 경우 데우거나 끓여 먹는 ‘R to C(Ready to Cook)’와 살짝 열만 가해 먹는 ‘R to H(Ready to Heat)’, 사서 바로 먹는 ‘R to E(Ready to Eat)’ 등으로 구분한다.

김치찜은 끓이거나 데우는 과정이 필요한 RTC 대표 제품이다. 기타 탕·찌개도 여기에 포함된다. 열만 가하면 되는 RTH에는 곤드레밥 같은 즉석밥이나 냉동피자, 레토르트 식품처럼 전자레인지 조리가 가능한 제품이 속한다. 반찬류나 포장 김치, 샐러드, 편의점 도시락 등은 RTE다.

가정간편식은 이처럼 간단히 끓이거나 데우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조리에 부담이 없다. 구하기 어려운 재료를 찾거나, 다루기 어려운 재료를 다듬을 필요도 없다. 재료를 사다가 요리하기는 번거롭고, 밖에서 외식하자니 탐탁지 않은 소비자에게 꼭 맞는다. 가정간편식의 경쟁 상대가 ‘줄 서는 맛집’, ‘유명 주방장의 레스토랑’이라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그래픽 = 조숙빈 디자이너

지난달 CJ제일제당이 새로 선보인 가정간편식 광고의 핵심 문구는 ‘매일매일 특별한 미식(味食)’이다. 광고 속에서 인기 배우 정유미 씨는 집에서 혼자 식사를 할 때도 마치 최고급 레스토랑에 온 듯 플레이팅(음식을 보기 좋게 담는 행위)에 신경을 쓴다. 하얀 도기에 정찬용 칼과 포크를 갖추고, 먹을 음식 사진을 찍어 SNS(사회관계망서비스)에 공유한다. 보통 한 제품이 매출이 100억원을 기록하면 ‘대박’이라고 여겨지는 식품 시장에서 광고 속 제품은 출시 1년 만에 200억원 어치가 팔렸다.

◆ 식품업계, ‘먹방계’ 유명 셰프 손잡고 간편식 라인 강화

최근 식품업계는 아예 셰프와 손을 잡는 분위기다. 강레오, 최현석, 이연복처럼 ‘먹방’을 선도하는 유명 셰프들이 가정간편식 개발에 참여하고, 서로 ‘비법을 담았다’고 말한다.

CJ제일제당은 셰프 10여 명으로 구성된 푸드시너지팀을 운영하며 이들을 HMR 제품의 개발단계부터 참여시키고 있다. 식품 개발을 담당하는 전문연구원들이 간과하기 쉬운 실제 외식에서 즐기는 대중적인 맛을 구현해 내기 위해서다. 지난해 6월 국·탕·찌개류 등 한식을 기반으로 상온 HMR 시장에 진출한 CJ제일제당이 지금까지 내놓은 육개장·삼계탕·된장찌개 등 9종의 제품이 셰프들의 손을 거쳤다.

‘비비고 육개장’ 개발을 주도한 김무년 푸드시너지팀 셰프는 “상온 HMR 제품이긴 해도 유명 맛집보다 더 맛있는 제품을 만드는 것이 요리사로서 목표였다”고 말했다.

지난 1월 HMR 전용 평택공장을 준공하며 사업 확대에 나선 롯데푸드는 최근 HMR 브랜드 ‘쉐푸드’의 디자인·메뉴 등을 리뉴얼했고, 유명 셰프 강레오와 손잡고 ‘쉐푸드 육교자’를 내놨다.

현대홈쇼핑이 ‘레스토랑에서 먹는 요리 그대로 집에서도 먹자’라는 콘셉트로 최현석·오세득 셰프와 공동으로 개발한 ‘H 플레이트 스테이크’는 지난 1월 첫 방송에서 10분 만에 주문액 10억원을 기록하며 완판되기도 했다.

이마트는 지난해 중화요리를 기반으로 ‘피콕 반점’이라는 자체 HMR 브랜드를 선보였다. 조선호텔 중식 레스토랑 호경전 출신 셰프가 상품개발팀에 합류해 전체적인 레시피를 총괄했다. 대상 청정원의 프리미엄 간편식 ‘휘슬링 쿡’에는 국내 특급호텔 출신으로 청정원 소속인 김규진 셰프가 참여했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서울국제간편식·HMR전시회를 찾은 관람객이 가정간편식을 살펴보고 있다.

◆ 1인 가구·맞벌이 가정 증가·여권 신장이 성장 이끌어

간편식은 식품 유형상 ‘가공식품’으로 분류된다. 건강을 해칠 정도로 품질이 떨어지는 것으로 인식되는 인스턴트 식품과 같은 류다. 하지만 현재 인기를 끄는 간편식은 신속한 배송을 무기로 방부제 등을 적게 써 예전에 비하면 몸에 나쁜 요소를 줄였다고 평가받는다.

박성우 농식품부 식품산업정책과장은 “최근 간편식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해 보면 간편식 이용 이유에 대해 ‘몸에 좋은 느낌이 들어서’, ‘집밥 같기 때문’이라는 답이 많을 정도로 이미지가 많이 개선됐다”고 말했다.

기업들도 소비자의 눈높이에 부응하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 중이다. 현재 하림그룹이 서울 서초구 양재동에 물류센터를 짓고 있고, 동원이 간편식 브랜드 더반찬 공장을 구로구 가산동에 차렸다. 배민프레시 공장은 부천에 위치해 있다. 업계는 물류센터뿐 아니라 포장 기술을 강화해 원래 맛을 보존하는 데도 공을 들이고 있다.

간편식 시장의 급성장에는 1인 가구 및 맞벌이 가정 증가, 여권(女權) 신장 등이 주된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마트 관계자는 “퇴근길 중년 남성이 순댓국이나 해장국 등 피코크 간편식을 구매하는 통계가 유의미한 수준으로 나온다”면서 “쉽게 얘기해 먹고 싶지만 부인에게 차려달라고 하기 힘든 음식을 사 가는 수요가 많은 것”이라고 말했다.

주방이 문화 공간임을 강조한 한샘키친 시리즈 중 하나. 주방임에도 노트북과 커피잔이 놓여 있다. 한샘 관계자는 “맞벌이 가정 증가 등으로 주방을 요리 공간 외의 목적으로 사용하고자 하는 욕구가 커지고 있어 나오게 된 디자인”이라고 설명했다.

젊은 부부들이 간편식을 즐겨 먹으면서 채소 판매량은 정체 양상을 보이고 있다. 각 마트에 따르면 무나 파, 마늘, 청양고추 등 음식 조리에 주로 쓰이는 채소 판매량은 4~5년째 매해 2~10% 감소 추세다. 판매량이 늘어나는 채소는 샐러드용 채소뿐이라는 것이 유통업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신정규 전주대 한식조리학과 교수는 “최근에는 겉 포장과 실제 내용물이 거의 차이가 없을 정도로 품질에 신경 쓴 가정간편식 제품이 늘고 있다”며 “가정간편식이 기존의 저렴한 이미지를 벗어나 진일보하면서 냉장고에 식재료를 잔뜩 쟁여놓는 시대는 끝나가는 추세”라고 말했다.

인테리어업체 투앤원디자인스페이스의 임승민 실장은 “음식 조리 시간이 줄어들며 주방과 거실이 일원화되는 것이 최근 추세”라며 “주방과 거실 사이에 와인바 등 홈바, 티 테이블이 갖춰지고 조명이 강화되는 등 주방이 즐기는 공간으로 탈바꿈하고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