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자영업자 A씨는 그동안 2대 가지고 있던 승용차를 최근 1대로 줄였다. 3000㏄ 중형차를 처분한 뒤, 다른 1500㏄ 차를 아내와 함께 타기로 한 것이다. 쓰던 가구와 가전제품도 꽤 낡았지만 새 걸로 바꿀 계획이 없다. A씨의 아들은 대학 졸업 후 2년째 취업 준비 중이고 대학생인 딸도 취직을 못 하면 대학원에 진학할 예정이라, 앞으로 돈 들어갈 데가 많기 때문이다. A씨는 “수출이 잘돼 경기가 좋아졌다고 하지만 내수(內需)가 부진한 탓에 장사가 잘 안 된다”며 “당분간 번 돈은 잘 모으되, 씀씀이는 더 줄이며 살아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요즘 A씨처럼 소비를 줄이면서 저축을 늘리려는 이들이 많아지자 ‘저축의 역설(逆說)’에 대한 우려가 나오고 있다. 개인들이 저축에 매달려 지나치게 소비를 줄이면, 생산 위축과 고용 감소로 이어져 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1분기 총저축률 외환위기 이후 최고… ‘저축의 역설’ 우려

올해 1분기 우리나라 총저축률은 36.9%로, 외환위기 당시인 1998년 3분기(37.2%) 이후 19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총저축률은 국민총처분가능소득에서 최종소비지출을 뺀 부분이 차지하는 비율을 나타낸다. 총저축률이 오른다는 것은 국민이 소비를 줄이고 저축을 늘린다는 뜻이다.

외환위기 때인 1998년 1분기에 우리나라 총저축률은 40.6%까지 올라갔다. 위기 극복 과정에서 소비가 극단적으로 줄었기 때문이다. 당시 은행 정기예금 금리는 연 17.71%까지 치솟아 저축하면 이자를 많이 받을 수 있었다. 이와 달리, 올 1분기엔 수출 호조로 우리나라 경제가 6분기 만에 0%대 성장률에서 탈출했고, 저금리로 정기예금 금리가 연 1.45%에 불과한 데도 소비보다는 저축이 늘어 총저축률이 크게 올랐다.

1분기 총저축률을 보면, 해마다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2011~2014년 34% 초반대에 머물렀던 1분기 저축률은 2015년 36.4%로 급등했고, 이후 3년 연속 36%대를 기록하고 있다.

특히 작년 3분기부터 올 1분기까지 저축률은 35.4%→35.8%→36.9%로 3분기 연속 상승했다. 같은 기간 민간소비 증가율(전분기 대비)은 0.6%→0.2%→0.4%에 그쳤다. 저축은 늘고 씀씀이는 부진했던 것이다.

저축률이 높아지는 이유에 대해 전문가들은 다양한 설명을 내놓고 있다. 우선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가계가 현재의 소비를 줄이고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저축을 늘리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기업들도 혁신을 통해 신(新)사업을 찾지 못하거나, 정부 정책이나 경제 상황에 대한 불확실성이 크다고 판단하면 투자를 꺼리고 저축으로 돈을 묶어놓게 된다.

성태윤 연세대 교수는 “가계 소비와 기업 투자가 줄면서 저축이 늘어나게 되면 경제 전체의 활력이 떨어지는 ‘저축의 역설’ 현상이 벌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소득 주도 성장’에도 걸림돌

문재인 정부의 핵심 경제 정책인 ‘소득 주도 성장’은 일자리를 늘려 소득을 높여주면 소비가 증가할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하지만 지금처럼 가계 저축률이 높아지는 상황이 계속 된다면, 소득이 늘더라도 소비보다는 저축을 하려는 경향 때문에 소득 주도 성장 정책은 애초 목표한 성과를 거두기 어려울 수 있다. 2011년 3.4%이던 가계 순저축률은 해마다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며 작년엔 8.1%까지 뛰었다.

이와 함께 1360조원에 육박하고 있는 가계부채도 소득 증가가 소비 확대로 직결되지 못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소득이 늘더라도 빚부터 갚아야 한다면 소비할 여력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또한 기업들이 저축했던 돈을 꺼내 투자에 적극 나서도록 하려면 기업 규제 완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