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0년 전 알렉산더 대왕은 풀기 어려운 매듭을 단칼에 잘라 '천재' 대접을 받았다. 유감스럽게도 현대사회에선 이런 '쾌도난마(快刀亂麻)'식 해법을 찾기 어렵다. 이해관계가 촘촘하게 얽혀 있는 경제 문제는 특히 그렇다. 문재인 정부는 '일자리 정책'의 일환으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밀어붙이고 있다. 기업들은 취지는 이해하지만, 현실은 매우 복잡하며, 비정규직 해소는 고난도 과제라고 하소연하고 있다. /편집자 주

지난 1월 김은숙(33·가명)씨는 10년 넘게 일했던 KB국민은행을 그만뒀다. 그는 지점 창구 전담 직원인 '텔러'였다. 처음 비정규직으로 입사했고, 무기계약직을 거쳐 2014년 1월 정규직으로 전환됐다. 바라던 정규직이 됐지만, 올 초 은행이 희망퇴직을 시행하자 미련 없이 그만뒀다. 퇴직금, 위로금 등을 합쳐 1억3000만원가량을 손에 쥐었다. 4억원이 훌쩍 넘는 고참 남자 직원에 비하면 적은 수준이지만 아쉽지 않다. 그는 "계약직 시절 희망퇴직을 했다면 6000만원 정도밖에 받지 못했을 것"이라며 "정규직 전환 후 증가한 업무 스트레스 등을 감안하면 잘한 결정"이라고 했다.

은행권은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정책의 모범생이다. 2007년 우리은행을 시작으로 대부분 은행이 정규직 전환을 완료했다. 이후 은행은 많은 이가 꿈꾸는 좋은 직장이 됐을까. 노(勞)도 사(使)도 고개를 가로젓는다.

은행권 인력 과잉 골머리, 희망퇴직에 4조원 쏟아부어

31일 은행권에 따르면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후 각 은행에서 인건비 부담이 3~10%가량 증가했다. 신한은행은 2011년 RS(retail service) 직군을 만들어 기존 계약직 직원을 RS 정규직으로 전환했다. 이 과정에서 해당 직군의 연봉은 신입 기준 2800만원에서 3100만으로 300만원가량 인상됐다. 현재 RS직 평균 연봉은 3800만원 정도다.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이후 은행별로 1000~3000명씩 늘어난 정규직 직원은 경영에 큰 부담 요인이 되고 있다. 한 시중은행장은 "업무 영역별로 필요한 정규직 인원이 정해져 있는데,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면서 잉여 인력이 많이 생겼다"고 말했다.

은행들은 탈출구를 '희망퇴직'을 통한 인력 감축에서 찾고 있다. 본지가 2007년 이후 은행권에서 '희망퇴직' 형태로 퇴출시킨 인원을 조사한 결과 총 2만590명으로 집계됐다. 10만명 수준인 전체 은행 직원의 20%나 되는 수치다. 통상 은행들은 희망퇴직을 시행할 때, 퇴직금 외에 36개월치 임금을 위로금으로 준다. 지난 1월 2800명을 희망퇴직시킨 국민은행의 경우 27~36개월치 급여를 위로금으로 줬다. 평균 지급금은 2억8000만원가량으로, 총 8000억원이 지출됐다. 금융계 관계자는 "최근 10년간 은행권이 부담한 희망퇴직 비용은 4조원 내외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희망퇴직이 연례 행사로 자리 잡으면서, 은행권 전체로는 정규직 숫자가 매년 줄고 있다. KB국민은행의 경우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이후 정규직 수가 2만514명(2014년)에서 1만9828명(2016년)으로 줄었다. 신한은행도 1만3879명→1만3819명으로 소폭 줄었다. KEB하나은행 관계자는 "이윤을 목표로 하는 기업에서 필요 수준을 넘는 정규직 숫자는 어떤 경로를 통해서건 정상으로 돌아오게 돼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과정에서 아무것도 양보하지 않는 정규직 노조의 행태에 아쉬움을 표한다. 김우진 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정규직 전환은 성과 중심으로 연봉을 차등화하는 등 유연한 임금 구조와 병행해야 하는데 반발 때문에 시행하지 못하고 있다"며 "지금의 경직된 인력 구조로는 순발력 있게 대응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격차도 여전, 1500만원 연봉 격차, 10년 후 5000만원

그렇다면 정규직 전환 후 직원들의 직장 만족도는 올라갔을까. 그렇지도 않다. 한 시중은행 노조 관계자는 "계약직 시절엔 단순 입출금 업무만 하면서 정시 출퇴근이 가능했는데, 정규직 전환 후 외환·기업금융·PB·대출 등으로 업무가 확대되면서 실적 압박까지 받게 돼 불만이 많다"고 했다.

상대적 박탈감도 여전하다. 국민은행은 2014년 1월 기존 L1~4로 있던 정규직 직급에 L0를 신설한 뒤, 이 직급으로 계약직을 정규직 전환했다. 일반 정규직(L1)보다 한 단계 낮은 직급을 만들어 나이에 상관없이 모든 계약직을 몰아넣은 것이다. 국민은행의 해당 직원은 “정규직이라고 모두 같은 정규직이 아니다”며 “또 하나의 신분이 생긴 셈”이라고 했다. 다른 시중은행도 마찬가지다.

높은 직급으로 가는 길이 열려 있긴 하다. 그러나 은행별로 승급에 성공하는 경우는 매년 3% 내외 수준에 그친다. 결국 퇴직 때까지 ‘하위 정규직’으로 머물다 가는 경우가 많다. 이런 차별 구조 탓에 지난 1월 2800명이 옷을 벗은 국민은행 희망퇴직에서 정규직 전환 직원들이 1000명을 차지했다. 국책연구원 관계자는 “정규직 전환만 되면 고용 보장은 물론 처우도 크게 개선될 것으로 생각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며 “경영에 크게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비정규직 근로자에게 진정 도움이 되는 실질적인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