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퇴직연금은 도입 10년 째에 접어들었지만 아직까지 ‘연금’이란 말을 붙이기가 무색하다. 수령자의 대부분이 적립금을 일시금으로 인출해가기 때문이다. 퇴직연금 가입자의 1%만이 연금으로 돈을 받아가고 있다.

안정적인 노후 소득을 위해 퇴직금보다 강제성 있게 만들어진 퇴직연금이 기존 퇴직금과 별다른 차이 없이 운영된다는 점은 큰 문제로 지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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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금 감면 혜택에도 일시금 인출 러시

퇴직연금 가입자는 은퇴 후 퇴직금이 IRP(개인퇴직연금계좌)로 자동으로 넘어간다. 이 때 가입자는 IRP에서 퇴직금을 한번에 다 인출할지, 아니면 10년 이상 연금 형태로 받을지를 결정해야 한다.

IRP에서 퇴직금을 한번에 다 인출하면 금액의 10%를 퇴직소득세로 내야한다. 반면 연금으로 나눠서 받으면 총 7%만 내면 돼 30% 가량의 세금을 아낄 수 있다.

예컨대 1억5000만원의 퇴직금을 일시금으로 인출할 경우 퇴직소득세율에 따라 450만~750만원에 해당하는 퇴직소득세를 내야한다. 그러나 퇴직금을 IRP통장으로 넣고 연금으로 받을 경우 퇴직소득세의 30%인 135만~225만원을 감면받을 수 있다.

정부가 퇴직연금을 연금으로 수령해 노후 자금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세제 혜택을 준 것이지만 큰 효과는 없다. 지난 2005년 도입된 퇴직연금은 2016년 말 퇴직 연금 수령을 개시한 사람은 24만718명으로 집계됐다. 이 중 98.4%는 일시금으로 퇴직금을 한번에 인출해 갔다. 나머지 1.6%만이 연금으로 나눠서 수령하고 있다.

◆ "티끌은 모아도 티끌"

전문가들은 일시금 인출의 근본적 요인으로 우리나라의 퇴직연금 제도가 역사가 짧고 퇴직연금 자산 규모가 소액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 때문에 퇴직연금이 향후 자리를 잡고 그 규모를 키워나가면 일시금 인출 비중이 자연스레 줄어들 수 있다는 설명이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퇴직연금 수령 조건을 갖춘 가입자가 많지 않다. 연금 수령 조건은 가입기간 10년 이상이면서 55세 이상이어야 하는데 우리나라 근로자들의 평균 근속기간이 짧아 수령할 수 있는 퇴직급여가 크지 않다. 2016년 IRP로 이전된 퇴직연금 적립금은 총 5조7617억원으로 1인당 평균 약 2390만원에 그친다.

2016년 말 수령 방식 별 평균 금액

실제 적립금이 적은 소액 계좌일수록 연금보다는 일시금 수령을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말 기준 일시금 수령 계좌의 평균 수령액은 1938만원에 그쳤다. 반면 연금 방식으로 수령하는 계좌의 평균 수령액은 3억1070만원으로 격차가 컸다.

한편, 일각에서는 근로자들의 가처분소득 감소나 생애주기별 지출 현황을 감안했을 때 퇴직연금 규모가 증가해도 뾰족한 대책 없이는 여전히 일시금 인출이 압도적으로 많을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퇴직연금 수령액은 적은데 생애주기 상 은퇴 시점에 큰 돈을 써야 할 곳이 많기 때문이다.

IRP의 일시금 수령자 중 91.4%는 일시금 사용처에 대해 자녀의 대학등록금, 결혼비용, 장례비 등이라고 답했다. 은퇴 전 퇴직연금을 몇 가지 제한적인 사유 내에서 중도인출할 수 있도록 허용돼 있는데 연령대별로는 30대가 전체 중도인출자의 46.5%를 차지했다. 중도인출 사유로는 주택구입이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50~60대 직장인의 중도인출 사유는 대부분 생활자금이나 부채상환, 주거비였다.

퇴직연금 일시 인출금 사용처

"연금 수령 시 더 획기적인 세제 혜택 있어야"

제도적인 문제도 지적된다. 주요 선진국의 경우 퇴직연금의 적립금을 중도 인출하는 경우 종합 과세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미국의 경우 적립금의 10%를 가산세로 부과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중도인출에 대한 페널티가 크지 않다.

전문가들은 무엇보다 일시금 인출을 줄이기 위해 획기적인 세제 혜택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IRP를 통해 연금으로 수령하는 가입자에게는 이연퇴직소득세를 지금보다 훨씬 낮은 수준으로 부과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해외에서는 이미 연금 수령의 인센티브를 크게 늘려놓은 덕에 연금 수령이 일반적이다. 호주는 퇴직금을 일시금으로 받을 때보다 연금으로 받을때 48%의 세금을 줄일 수 있다. 미국의 경우 50대부터 퇴직연금 세제혜택이 연간 소득공제 한도를 넘어서도 추가 소득공제를 제공한다. 사적연금 시장을 강화한 네덜란드 등의 유럽국가들은 아예 일시금 수령을 금지하고 연금 수령을 의무화했다.

전문가들은 연금 수령 시 현재 30%의 세제혜택을 획기적인 수준으로 늘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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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는 연금 해지를 방지하기 위한 다양한 장치를 고안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목돈이 필요한 경우 적립금의 일부만 받아갈 수 있는 ‘부분연금’도 검토할 만하다.

연금을 담보로 받을 수 있는 대출도 활성화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류건식 보험연구원 연구위원은 “현재 법적으로 연금 담보대출이 가능하지만 수급권 문제가 걸려있어 금융회사에서 대출을 꺼려하고 있다”며 “이자율이 높은 수준인데다 관련 규정도 체계가 없어 사문화됐다”고 말했다.

DC형의 경우 중도인출을 원천적으로 금지하거나, 연금의 완전 해지를 막기 위해 부분 중도 인출을 가능하게 하는 현실적인 방안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류 연구위원은 “대부분의 해외 국가는 중도인출을 사망이나 질병 등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기본적으로 중도인출을 금지하고 있다”며 “우리나라 사정에 맞게 당장 목돈이 필요하다면 일부 금액을 중도인출해 해지까지 가지 않도록 하는 것도 하나의 방안”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