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순혈(純血)주의’ 노선을 걸어온 현대자동차가 지난해부터 국내 벤처기업 투자를 늘리는 등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그동안 현대차는 신사업을 시작할 경우 계열사를 만들어 수직계열화하는 방식을 고수해 왔다. 경쟁사들이 인수합병(M&A)과 벤처 기업 투자에 앞다퉈 나설 때도 현대차는 외부 기술도입 없이 자체적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경향을 보여왔다.

그러나 전기차 등 자동차와 정보기술(IT)이 융합되는 4차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현대차도 변화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자동차 부품의 상당수가 전장(電裝, 전자 장비)화되고, 자동차 애프터마켓(물건을 팔고 난 다음에 발생하는 수요)이 커지면서 현대차도 기술독자노선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현대차의 벤처기업 투자 규모는 여전히 미미한 수준이다. 그러나 이종 산업 간 협업이 중요시되는 자동차 산업의 변화를 수용하고 따라간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변화다. 완성차업계 한 관계자는 “기업 인수나 지분 매입은 현재 사업뿐 아니라 미래 사업을 위한 전략적 투자”라며 “계열사를 만들어 신사업을 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지분 투자를 하는 것은 이전과는 달라진 현상”이라고 말했다. 현대차가 최근 지분 투자한 곳은 소프트웨어와 인공지능, 중고차사업 등 미래먹거리 산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이 올해 1월 열린 CES에서 미래 자동차 기술에 대해 프리젠테이션하고 있다.

◆ 인공지능·증강현실 분야 투자...미래차 개발나서

현대차는 자율주행에 필요한 인공지능(AI)과 증강현실(AR) 분야 투자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지난 2월 자율주행차 연구개발(R&D)을 전담하는 조직을 신설하고 관련 전문가를 영입하는 등 자율주행차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현대차가 지난해 3월 AR 소프트웨어 전문기업인 맥스트에 5억원을 투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맥스트는 ‘AR SDK 3D’라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이 기술은 이미지 위에 증강현실을 구현하는 기존 방식과 달리 3차원 현실 공간 위에 증강현실을 구현할 수 있다. 현대차는 맥스트의 기술을 ‘현대버추얼가이드’ 애플리케이션에 적용, 미국에서 이미 상용화한 상태다. 현대차 관계자는 “맥스트의 AR SDK 3D는 보다 다양한 증강현실 콘텐츠를 개발하는 데 유용한 도구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해 12월에는 AI 소프트웨어 개발업체인 스트라드비전코리아에 7억2500만원을 투자해 지분 5.9%를 확보했다. 스트라드비전코리아는 자율주행에서 필요한 보행자검출, 장면문자검출 등의 분야에서 기술력을 인정받은 벤처기업이다. 현재 스트라드비전코리아는 현대차의 첨단운전자보조시스템(ADAS)용 물체검출 소프트웨어(보행자, 차량, 교통 표지판 인식 등)를 개발하고 있다.

김필수 대림대 자동차과 교수는 "최근 자동차 산업에서 외부 기업체, 대학, 연구소와 협업하는 것이 시대적인 흐름"이라며 "현대차의 경우 아직 투자 금액이 크지 않지만 변화를 시도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조선일보DB

◆ 인증중고차 사업에 관심 보이는 현대차

수입차들이 주로 해왔던 인증중고차사업은 현대차가 최근 관심을 보이는 분야 중 하나다. 인증 중고차는 자동차 회사가 직접 보증하고 자체 매장을 통해 판매하는 중고차를 말한다. 이를 위해 현대차는 지난해 12월 HK유카글로벌 지분 5.62%(10억6500만원)를 확보했다.

HK유카글로벌은 2006년 12월에 설립된 벤처기업으로 현대차그룹의 사내기업에서 출발했다. 기아차의 경차 조립 위탁 생산 업체인 동희오토의 계열사다. HK유카글로벌은 현재 현대차와 기아차의 인증중고차 유통 부분을 담당하고 있으며 친환경전기차 등의 애프터마켓까지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현대차가 인증중고차사업에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현대차 중고차의 잔존가치를 관리하기 위한 것이다. 지나친 중고차 시세 하락은 해당 브랜드의 부정적인 이미지로 이어져 신차 판매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업계 한 관계자는 “새 차 뿐 아니라 중고차까지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며 “인증중고차사업을 통해 검증된 자동차를 판매하면 브랜드 이미지도 올릴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