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국가정보국(DNI) 산하 국가정보위원회(NIC)는 작년 12월 당시 트럼프 대통령 당선자에게 ‘글로벌 트렌드:진보의 역설’이라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세계 각 지역의 정세에 관한 향후 5년의 단기 예측과 2035년까지의 장기 전망을 담은 자료였다.

보고서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의 핵심 이슈를 다루고 있다. 글로벌 트렌드 변화와 관련해 개별 국가 차원, 대륙별 세력권 차원, 글로벌 차원의 세 가지 시나리오와 함께 미국의 대응 전략을 제시하고 있다.

보고서의 예측에는 암울한 내용이 적지 않다. 부의 불평등이 증가해 사회적 긴장이 고조되고, 인공지능이 예상보다 더 많은 산업을 파괴해 수많은 실직자들의 반발을 초래할 것으로 내다봤다. 신기술 발달로 국가간 무역이 감소하고, 정부에 대한 대중의 신뢰하락으로 국정 운영이 점점 힘들어질 것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단기적으로 위험을 야기하는 추세가 장기적으로 더 좋은 기회를 가져올 기회를 창출할 수도 있다’고 했다. 여성과 소수집단을 포함해 모든 개인의 잠재력을 이끌어내고 포용하는 사회는 뜻밖의 역경에 부딪혀도 굴하지 않고 새로운 기회를 잘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국가정보위원회는 4년 주기로 대통령 선거 직후 당선자에게 이런 미래전략보고서를 제출하고 있다. 1996년 ‘글로벌 트렌드 2010’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모두 6개 보고서가 나왔다. 2012년 오바마 대통령에게 보고한 ‘글로벌 트렌드 2030’까지는 연도 표기가 들어갔지만 이번엔 빠졌다.

요즘 같은 불확실성의 시대에 향후 10~20년의 변화를 예측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러나 정확한 예측이 불가능하다고 해서 전망과 비전 없이 국정을 운영하는 것은 나침반과 해도(海圖) 없이 폭풍우 치는 바다를 항해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그때그때 현안에 매달려 우왕좌왕하다 방향을 잃고 표류하기 십상이다.

그래서 미국은 물론 많은 선진국들이 체계적으로 미래 연구를 하고 있다. 영국은 다양한 분야의 미래 전망과 대비를 위해 1994년 ‘미래예측 프로그램(Foresight Programme)’을 출범시켰다. 핀란드 정부는 4년마다 15년 후의 미래상에 대한 예측과 대응방안을 만들어 의회에 제출하고 있다.

한국은 미래 연구와 대비 측면에서 상당히 뒤처져 있다. 정부 차원의 역량이 크게 떨어진다. 무엇보다 기획재정부가 중장기 전략과 비전 수립은 뒷전으로 미룬채 단기 정책만 생산하고 있다. 사실상 ‘기획’ 기능이 실종됐다. 공직 사회 내에서 “지금 공무원들은 미래를 생각할 틈도 기회도 없다”는 푸념이 나올 정도다.

이명박 정부의 청와대에서 근무했던 김대기 전 정책실장은 1994년 경제기획원과 재무부 합병이 그 시발점이라고 했다. 미래에 대한 큰 그림을 그렸던 기획원과 단기 현안에 집중했던 재무부가 재정경제원으로 통합되면서 정부 정책 기능이 당장 시급한 과제 중심으로 돌아가게 됐다는 것이다. 김영삼 정부 때 5년 단위 국가 계획이 폐지된 것은 그 상징이다.

미래를 예측하고 장기 비전을 수립하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김대중 정부는 ‘비전 2011’, 노무현 정부는 ‘비전 2030’, 이명박 정부는 ‘미래비전 2040’을 각각 만들었다. 그러나 비전 발표 행사를 갖고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차기 정부로 성과가 이어지지 않았다. 새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전(前) 정부의 흔적 지우기에 나서면서 비전 보고서도 함께 폐기했다.

그나마 박근혜 정부는 아예 국가 장기전략에 손도 대지 않았다. 경제혁신 3개년 계획 등 임기내 정책과제에만 매달리며 장기 비전을 도외시했다. 이명박 정부 말기 기획재정부에 신설했던 장기전략국은 박근혜 정부 들어 미래사회정책국과 미래경제전략국으로 두 차례나 이름이 바뀌었다. ‘미래’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었지만 사실상 현안 처리 부서로 전락했다.

문재인 정부의 정책 과제 중 하나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국가의 미래를 설계하고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다. 선진국 수준의 미래 연구와 대비 기능을 갖추는 것이다. 정권을 이어가며 장기 비전과 전략을 꾸준히 수정·보완하고, 정책의 일관성과 예측 가능성을 높일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비전 2030’ 업그레이드가 그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노무현 정부의 비전 2030은 ‘세금 폭탄’ 합리화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지금까지 나온 미래 전략 가운데 가장 완성도가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보고서가 제시했던 많은 해법이 그동안 알게모르게 시행됐다. 재조명할 가치가 충분히 있다.

마침 노무현 정부 때 비전 2030 작성의 실무 책임을 맡았던 김동연 아주대 총장이 새 경제부총리로 내정됐다. 새 경제팀 인선이 정부의 ‘기획’ 기능을 되살리고, 정책의 시계(視界)를 넓히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