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지칭하는 별명 중 하나가 '다이내믹 코리아'였습니다.(중략) 공정한 시장 질서를 재확립해 한국 경제의 활력을 되살리겠습니다."

17일 문재인 정부의 재벌 개혁을 주도할 공정거래위원회 수장(首長)으로 내정된 김상조(55) 한성대 교수는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장면을 TV 생중계로 지켜본 재계 관계자들의 반응은 '안도 반(半) 우려 반'이었다. 익명을 요구한 재계 관계자는 "'재벌 저격수'로 불리는 김 내정자가 재벌 개혁을 핵심 공약으로 내세운 문재인 정부의 코드에 맞춰 강도가 센 발언을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경제 활력 회복을 일성(一聲)으로 내세웠다"고 말했다. 반면 다른 재계 관계자는 "20년 넘게 대기업을 비판해온 김 내정자의 소신(所信)이 변하겠느냐. 결국 대기업을 옥죄는 정책을 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20년간 재벌 비판해온 원조(元祖) 재벌 개혁론자

김 내정자는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 외환 위기 직후부터 참여연대와 경제개혁연대 등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며 소액주주 보호와 재벌 지배구조 개혁에 앞장서온 원조(元祖) 재벌 개혁론자다. 그는 지난해 12월 국회에서 열린 최순실 국정농단 국정조사특별위원회 청문회에 참고인으로 출석해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다. 당시 김 내정자는 "삼성그룹 의사 결정은 이사회가 아닌 미래전략실에서 이뤄지고 있다. 미래전략실은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지만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삼성그룹을 비판했다.

김상조(오른쪽) 신임 공정거래위원장 후보자와 피우진 신임 국가보훈처장이 17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기자들의 질문을 받으며 웃고 있다.

올해 1월에는 박영수 특검팀이 이재용 삼성 부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되자 김 내정자를 불러 '특강'을 들었다. 특검은 김 내정자의 논리를 토대로 뇌물죄를 적용해 이 부회장을 구속했다.

김 내정자는 총선이나 대선 때마다 정치권의 영입 제의를 받았지만, 이를 거부해왔다. 그러나 지난 3월 김광두 서강대 교수와 문재인 후보 캠프에 합류해 문 대통령의 경제 공약인 'J노믹스'를 정비하는 역할을 했다. 그는 캠프에 합류한 이유에 대해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국내외 경제 상황에서 다음 대통령은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절박한 사명감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4대 재벌' 개혁에 집중할 듯

김 내정자는 "대기업을 전담하는 조직을 강화해 4대 재벌을 우선 감독하면 나머지 기업들도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이라는 지론을 펴왔다. 모든 대기업에 똑같은 잣대를 들이대지 않고, 경제력이 집중된 4대 재벌을 타깃으로 하겠다는 뜻이다. 그는 지난해 12월 본지 인터뷰에서 "중견 그룹은 (지배구조 개혁보다) 부실 구조조정이 더 시급하다"고 했다.

피해자 가운데 일부가 소송을 내서 이기면 모든 피해자가 똑같이 배상받을 수 있는 집단소송제를 전면 도입하겠다는 공약도 그가 오랫동안 주장해온 정책이다. 다만 공정거래법 위반 사건에 대해 공정위만 고발권을 갖는 전속고발제 폐지 공약에 대해서는 "한국의 현실에 맞는 방법을 심도 있게 논의해서 추진할 계획"이라고 했다.

이념적 선명성보다 현실적인 정책 강조

김 내정자는 '재벌 개혁'이라는 목표는 일관되게 유지해왔지만, 이를 달성하는 방법론 측면에서는 급진적이지 않고 합리적이라는 평가를 받아 왔다. "재벌 개혁론자이지만 재벌 해체론자는 아니다" "진보 경제학자이지만 이념만 앞세우는 배타적인 진영론자는 아니다"라는 것이다. 그는 '삼성 저격수'였지만 삼성 사장단 회의에 참석해 '경제민주화와 삼성'을 주제로 강연할 정도로 소통을 중시했고, 진보 진영을 향해서도 쓴소리를 서슴지 않았다.

당초 문 대통령 공약 초안에 들어간 '기존 순환출자 해소' 공약을 완화한 주역도 김 내정자인 것으로 알려졌다. 오래전에 만들어진 순환출자를 해소하려면 막대한 자금이 필요한데, 자칫 순환출자 규제가 투자나 고용을 악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재계는 이날 김 내정자의 발언에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여전히 긴장한 표정이다. 한 경제단체 관계자는 "김 내정자는 누구보다 대기업의 속성을 잘 아는 인물"이라며 "김 내정자가 환부(患部)만 절묘하게 들어내는 용한 외과의사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