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애플·구글·IBM 등 글로벌 기업들이 앞다퉈 이스라엘 스타트업(창업 초기 기업)을 사들이고 있다. '유니콘(기업 가치 1조원 이상 스타트업) 사냥터'라는 별칭으로 불릴 정도다. 최근 미국 인텔이 이스라엘의 모빌아이를 153억달러(약 17조5000억원)에 인수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스라엘 스타트업이 인수·합병 시장에서 주목받는 이유는 이들이 단순히 아이디어에 기반한 창업이 아니라 인공지능(AI), 머신러닝(기계학습), 사이버 보안, 센서, 무인 항공기, 빅데이터·스마트 배터리 등 첨단 기술 분야에서 독자적인 기술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기술 스타트업이 이스라엘에 6000여 개가 있고, 매년 1500개가 새로 생겨난다. 전문가들은 "글로벌 IT 기업들이 4차 산업혁명이라는 엄청나게 빠른 기술 변화 속도에 대응하기 위해 필요한 기술을 갖춘 이스라엘 벤처 인수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스라엘 예루살렘에 있는 한 스타트업 투자 회사 사무실에서 직원들이 회의하는 모습. 매년 1500개씩 새로운 기업이 설립되는 이스라엘 스타트업 업계는 삼성전자·애플·구글·IBM 등 글로벌 기업들이 앞다퉈 인수 대상을 물색하는 인수합병(M&A) 격전지다.

이스라엘은 글로벌 기업들의 스타트업 투자 전쟁터

삼성전자는 지난 2월 '고화질(HD)베이스티'라는 데이터 전송 기술을 보유한 이스라엘 스타트업 발렌스에 골드만삭스 등 공동 투자자들과 함께 6000만달러(약 681억원)를 투자했다. 발렌스가 보유한 실시간 데이터 전송 기술은 앞으로 자동차의 정보를 외부의 대형 컴퓨터(서버)와 연결하는 데 필수적인 기술로 꼽힌다. 삼성은 앞서 작년 9월에는 이스라엘에 스타트업 지원센터인 '삼성 넥스트 텔아비브'를 설립했다.

삼성전자가 지난 3년 동안 투자한 이스라엘 스타트업만 해도 20곳 정도다. 최근 삼성전자의 투자 목록에는 기업용 보안 소프트웨어 업체 '인티저'(투자금액 100만달러), 모바일 소프트웨어 업체 '세이프DK'(350만달러), 듀얼 카메라 전문 업체 '코어포토닉스'(1500만달러) 등이 올라 있다.

애플은 올 초 안면 인식 기술 업체 리얼페이스를 약 200만달러에 인수했다. 3년 전 창업한 이 회사는 이용자의 여러 사진 중에서 가장 잘 나온 사진을 자동으로 골라주는 독자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스마트폰이나 PC에 접속할 때 비밀번호 대신 얼굴로 로그인하는 기술도 갖췄다. 미국 언론들은 "애플이 올가을 발표할 아이폰8(가칭)에 이 회사의 기술을 활용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애플은 지난 6~7년간 플래시 메모리 업체 아노비트, 입체(3D) 센서 업체 프라임센스, 디지털 사진업체 링크스 등 분야별 독자 기술을 가진 스타트업을 수백억~수천억원씩 주고 꾸준히 인수하고 있다.

차량 공유 업체 우버는 지난해 6월 이스라엘의 무인 트럭 회사 오토(Otto)를 6억8000만달러에 인수했다. 오토의 무인 트럭은 5만캔 분량의 맥주 버드와이저를 싣고 미국 콜로라도주에서 120마일(약 193km) 거리를 안전하게 달려 무인 차량이 상업용 화물을 실어나른 첫 사례로 남았다.

최근엔 화웨이와 같은 중국 업체들이 이스라엘 스타트업 시장에 큰손으로 등장하고 있다.

화웨이는 작년 말 헥사티어와 토가 네트웍스를 각각 4200만달러와 1억5000만달러에 사들였다. 헥사티어는 데이터베이스(DB) 보안 업체고, 토가 네트웍스는 이메일이나 인터넷 로그인 기록으로 이용자를 식별하는 기술을 보유했다. 알리바바는 올 초 증강현실(AR) 스마트 안경 제조 업체인 루무스에 600만달러를 투자했다. 푸싱그룹은 의학 진단 업체 체크캡에 1200만달러를 투자했다. 이스라엘 정부 통계에 따르면 2015년 이스라엘에서 탄생한 스타트업 20% 이상이 중국 자본을 투자받았다.

이스라엘의 한 스타트업 사무실에서 직원이 책상 옆에 이스라엘 국기를 꽂은 채 업무를 보고 있다. 이스라엘 스타트업은 단순한 아이디어보다는 경쟁력을 갖춘 독자 기술에 기반을 두고 창업하는 경우가 많아, 창업 직후부터 인수 제의를 받는 경우도 적지 않다.

세계에서 통할 기술로 스타트업 창업

세계 테크놀로지 대기업들이 이스라엘 스타트업에 눈독을 들이는 이유는 이들이 단순한 비즈니스 아이디어가 아닌 이미 검증된 기술력을 바탕으로 창업하기 때문이다. 인수한 뒤 곧바로 이들의 기술을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직원 수가 많아 봐야 수십 명인 소규모여서 인수 후 조직 갈등과 같은 위험 요소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애초부터 연구소나 대학에서 독자 개발한 핵심 기술을 제대로 해외에 팔기 위해 창업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윤종록 정보통신산업진흥원장은 "내수 시장이 작아 이스라엘 스타트업은 창업 초기부터 세계시장을 시야에 넣고 뛴다"며 "자국 내 1위 기술은 의미가 없고 오직 세계에서 통할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글로벌 IT 기업들이 될성부른 이스라엘 스타트업을 입도선매하면서 이스라엘 내에서는 '이스라엘 패러독스(paradox)'라는 비판도 나온다. 팔리기 위한 창업에 치중하다 보니 정작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대형 기업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루살렘포스트는 최근 "이스라엘에서 혁신적인 기술이 계속 나와도 성공한 스타트업 대부분이 외국에 팔리다 보니 정작 이스라엘 내 산업 육성과 고용 창출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