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연 회장

요즘 채권 시장에서 한화그룹 계열사 회사채는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인기가 높다. 지난 2월 한화케미칼은 500억원어치 회사채(3년 만기물) 발행을 앞두고 사전 청약을 진행했는데, 투자자들에게서 6350억원 주문이 몰려 13대1 경쟁률을 보였다. 2012년 사전 청약제가 도입된 이래 최고 경쟁률이었다. 높은 인기 덕분에 당초 희망 금리보다 0.5%포인트 낮은 연 2.5% 수준으로 발행에 성공했다. 지난 2월 한화에너지가 800억원을 모집할 땐 6400억원이, 지난달 ㈜한화의 1000억원 모집엔 3900억원 주문이 들어왔다.

김선주 SK증권 연구원은 "작년 6월만 해도 ㈜한화는 실적 우려로 1000억원 규모 채권 모집에 230억원 미달이 발생하는 등 한화그룹 회사채는 인기가 별로였다"며 "최근 주력사들의 실적 개선세가 뚜렷해지면서 반년 만에 상전벽해가 됐다"고 말했다.

재계 8위인 한화그룹이 최근 불확실한 경제 상황에서도 돋보이는 실적을 올리며 주목받고 있다. 지난해 영업이익은 전년(2조원)의 2배에 가까운 3조6200억원으로 뛰었다. 매출도 52조원대에서 56조원대로 늘었다. 역대 최대 실적이다. 특히 삼성에서 인수한 화학사인 한화토탈이 그룹 전체 이익의 40%인 1조5000억원, 한화케미칼은 전년의 2배 이상인 4000억원의 이익을 냈다. 4000억원대 적자를 냈던 한화건설의 흑자 전환도 실적 개선에 기여했다.

어려울 때 뚝심 투자, 결국 빛 봤다

실적 개선 비결에 대해 전문가들은 남들이 포기할 때 투자했기 때문이라고 평가한다. 한화는 그룹 핵심 산업을 화학과 방산으로 삼고, 이 분야에 '선택과 집중' 해왔다. 특히 업황이 안 좋을 때마다 매물로 나온 실속 기업들을 싸게 사들였다.

지난해 한화토탈은 사상 최대인 1조5000억원 영업이익을 올려 한화그룹 역사상 최대 이익을 낸 계열사로 등극했다. 한화토탈은 페트병·스티로폼 등의 기초 원료를 생산하는 화학사로, 삼성그룹이 2014년 고유가로 인한 실적 악화 우려 등으로 한화에 매각을 결정했다. 매각 당시 증권가에선 "삼성은 잘 팔았고, 한화는 잘못 샀다"는 평가도 나왔다. 그러나 인수 직후 유가가 급락했고, 제품 가격은 급등하면서 호황을 누리게 됐다. 한화 관계자는 "인수 수년 전부터 방산·화학을 키우기 위해 삼성 계열사를 눈여겨봤고, 기회가 왔을 때 놓치지 않았다"고 말했다.

지난해 영업이익(2408억원)이 전년보다 두 배 가까이 늘어난 태양광 업체 한화큐셀도 업황이 안 좋을 때 키웠다. 2010년 침체기가 시작될 때 중국 솔라원을, 이듬해 법정관리 중이던 독일 큐셀을 인수해 2015년 합친 게 한화큐셀이다. 김승연 회장은 2011년 직원들에게 "태양광 같은 미래 사업은 장기적으로 키워야 하니, 당장의 수익에 일희일비하지 말라"며 투자를 밀어붙였다. 한화그룹 관계자는 "1981년 2차 석유 파동 당시 한국에서 철수하던 다우케미칼의 한국 사업을 인수해 한화케미칼을 키웠고, 2002년 누적 손실이 2조원이던 대한생명을 인수해 한화생명을 키웠다"며 "위기일 때 투자하는 것은 한화그룹의 DNA"라고 말했다.

M&A 후 '화학적 결합'도 성공 비결

업계에선 한화의 또 다른 실적 비결로 '인수 후 조직 간 화학적 결합의 성공'을 꼽는다. 한화그룹은 2014년 말 삼성에서 화학·방산 4개사를 인수한 뒤, '삼성맨'이었던 직원들의 사기와 능력을 최대한 살려주는 데 중점을 뒀다. 삼성에선 비주력 회사였던 이들을 그룹 본사 건물에 입주시키는 등 그룹 '핵심 계열사'로 대우했다. 기존 경영진은 최대한 유임시켜 조직 운영 방식을 최대한 유지했다. 한화토탈의 경우, 인수 직후 임원 40여 명 중 사장 포함 5명만 교체했다.

한편으로는 새 직원들에게 한화의 조직 문화도 적극 알리고 있다. 한화는 해마다 야구 시즌만 되면 직원들에게 티켓을 주며 관람을 독려한다. 한화 이글스를 응원하며 일체감을 다지자는 취지다. 최선목 한화 부사장은 "인수한 기업을 점령군처럼 장악하지 않고, 그들의 핵심 역량을 배워 전체 조직을 발전시키자는 것이 우리의 M&A 원칙"이라고 말했다.

재계 관계자는 "아직 분야별로 업계를 선도하는 1등 회사가 부족하고 주력사인 금융 계열사들의 실적이 부진한 점, 덩치를 키운 방산 부문이 시너지를 내야 하는 점 등은 향후 한화가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