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미국항공우주국(NASA)의 유인(有人) 우주탐사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흑인 여성 과학자 3명을 다룬 영화 '히든 피겨스(Hidden Figures)'가 국내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백인 남성 중심 NASA에서 흑인 여성 과학자들은 새로운 길을 만들어 꿈을 이뤘다. 국내에도 우주개발 최전선에 있는 한국판 히든 피겨스가 있다. 국내 대표적인 우주개발 연구기관인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은 최근 임석희(43) 연구원 등 여성 과학자 3명을 한국의 히든 피겨스로 연구원 블로그에 소개했다. 항우연에는 현재 전체 연구원 795명 중 63명(8%)이 여성 연구원이다. 대전 항우연에서 만난 한국의 히든 피겨스는 "여성이 소수여서 힘든 일이 분명 있지만 우주에 대한 열정에서는 남녀 차이가 없다"며 "요즘에는 오히려 집단 연구에 뛰어난 여성 과학자들이 더 부각되고 있다"고 말했다.

임석희 연구원은 러시아 바우만공대 로켓엔진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대학 졸업 후 대기업에 취직하려고 했는데 탈락했어요.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우주 선진국 러시아로 유학을 간 게 전화위복이 됐습니다." 임 연구원은 "한국으로 돌아와 항우연에 오니 저까지 여성 연구원은 5명뿐이었다"며 "인정받기 위해 남자 연구원들보다 두세배 더 열심히 일했다"고 말했다. 임 연구원은 "항우연에 입사할 당시 반대했던 상사가 나중에 '생각이 짧았다. 앞으로 여성 연구원을 더 많이 뽑겠다'고 했을 때 정말 기뻤다"고 했다.

지난달 31일 대전 한국항공우주연구원에서 (왼쪽부터) 이나영·임석희·박민주 연구원이 한국 최초 우주로켓인 나로호의 모형 앞에 섰다. 여성 연구원들은 “어린 학생들이 우리를 보고 ‘여성도 우주개발에 참여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

임 연구원은 2009년 한국 최초 우주로켓 나로호의 1차 발사 실패 직후 전남 고흥 나로우주센터에서 전체 연구원들 앞에서 정동묵 시인의 '꼭 가야 하는 길'이란 시를 낭송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가 "막혀도 막혀도 그래도 나는 간다. 혼이 되어 세월이 되어"라고 시를 읽어 내려가자 곳곳에서 울음이 터져 나왔다.

기상환경관측위성 천리안 2호 개발에 참여 중인 이나영(40) 연구원은 "전기전자가 중심인 인공위성에서는 아이디어만 좋으면 나이도 성별도 상관없다"며 "여러 분야 사람들이 협업하는 우주개발에서는 오히려 대화와 소통 능력이 뛰어난 여성이 더 강점을 발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임석희 연구원은 또 "요즘 우주를 다룬 영화들마다 여성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것도 최근의 변화를 반영한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판 히든 피겨스는 "우주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있는 곳"이라고 말했다. 한국형 발사체의 엔진을 개발하고 있는 박민주(39) 연구원은 "미래에 우주여행 패키지를 개발하는 게 꿈"이라며 "크루즈를 타고 바다를 여행하듯 우주선을 타고 지구 밖으로 나가는 상상만 해도 즐겁다"고 말했다. 이나영 연구원은 "전자회사에 간 친구들은 6개월짜리 프로젝트를 하지만 여기서는 최소 6년짜리 대형 프로젝트를 한다는 자부심이 있다"고 말했다.

박민주 연구원은 "대학에서 우주 관련 전공을 공부하는 여학생이 절대적으로 적다"며 "중·고교에서 여성들도 우주개발에 참여할 수 있다고 격려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박 연구원은 중학교 과학 선생님의 영향으로 우주의 꿈을 키웠다고 했다.

기혼인 박 연구원과 이 연구원은 "남편과 아이들이 내가 하는 일을 자랑스러워하고 전폭적으로 지지해주는 것도 큰 힘이 된다"고 말했다. 박민주 연구원은 "히든 피겨스 영화에서 친정어머니가 딸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도록 손자를 도맡아 키우는 모습을 보고 꼭 내 얘기 같아 찡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