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이 달라지고 있다. 2월 28일 그룹 미래전략실(미전실) 해체 이후 한 달여가 지나는 동안 금융 계열사에서는 삼성그룹이 금과옥조로 여겼던 6시 30분 출근제도를 없앴고, 삼성의 한 핵심계열사가 관계사 삼성디스플레이 부품 공급 업체에서 탈락하는 이례적인 사태도 빚어졌다. 또 신규 사업 분야에서 각 계열사가 각개약진하며 사업 중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삼성 고위 관계자는 그러나 "미전실을 없앤 취지가 회사별로 대표이사와 이사회를 중심으로 자율 경영을 강화하자는 것"이라며 "바뀐 상황에 맞는 새로운 원칙과 관행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계열사별 독자 움직임 시작

미전실 해체 후 첫 변화의 움직임은 금융 계열사에서 나타났다. 삼성생명·삼성화재·삼성카드 등 금융 계열사들은 3월 중순 임원 출근 시각을 오전 6시 30분에서 오전 8~9시로 조정했다. 자율 경영의 취지대로 고객과 거래처 근무 시간에 맞춰 출근 시각을 조정한 것. 삼성 임원의 6시 30분 출근은 지난 2012년 7월부터 미전실을 시작으로 전 계열사로 확산됐다. 당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이른 아침 시간에 서초 사옥으로 출근하자, 미전실에서 이 회장의 의중을 계열사로 전파했었다. 삼성 관계자는 "금융 계열사의 출근 시각 조정은 미전실 해체를 실감 나게 하는 조치"라며 "미전실이 있을 때는 상상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5일 서울 강남 삼성전자 서초 사옥 입구에서 운송업체 직원들이 해체된 미래전략실 사무실에서 나온 사무용 집기들을 옮기고 있다. 삼성그룹에서 미래전략실이 없어진 지 한 달이 지나는 동안 삼성 주요 계열사들은 크고 작은 변화를 겪고 있다.

미전실 체제에서는 생각하기 힘들 일이 다른 분야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삼성디스플레이는 최근 계열사에서 구매하던 디스플레이 재료 물질 중 녹색인광을 일부 일본 업체에서 구매하기로 했다. 금액은 100억원 수준으로 크지 않지만, 이 계열사 내부에서는 부품 공급 업체 선정에서 탈락했다는 점에 충격을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갤럭시S8에 들어가는 카메라 모듈 역시 삼성전기와 전문 중소기업들이 물량을 절반씩 나눠 공급하고 있다. 중소 부품업계 관계자는 "삼성전자 외부 업체는 물론 계열사끼리도 경쟁 체제가 강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삼성 계열사의 한 임원은 "앞으로 부품 계열사들은 더 힘들어질 수 있다"며 "이전에 일종의 할당량처럼 당연히 공급하던 물량에 대한 보장은 없어졌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컨트롤타워 부재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하지만 컨트롤타워 부재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한국증권거래소는 지난 6일 삼성바이오로직스를 불성실 공시 법인으로 지정했다. 자회사인 삼성바이오에피스가 금융감독원에 감사보고서를 제출한 사실을 뒤늦게 공시하는 어처구니없는 실수 때문으로 알려졌다. 한 삼성 임원은 "옛날처럼 미전실에서 챙겼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계열사 간 사업 중복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크다. 삼성 내부적으로 자동차 전자 장비 분야와 사물인터넷(IoT), 인공지능(AI) 등 신규 사업에서 계열사 간 중복이 빚어질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인공지능에서는 삼성전자와 IT 서비스 기업인 삼성SDS, 사물인터넷 분야에서는 삼성전자와 삼성전기의 일부 사업이 겹칠 우려가 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예전에는 계열사 간 중복 투자가 우려될 경우 미전실에서 나서서 교통정리를 했지만 앞으로는 계열사 CEO들끼리 치열하게 논쟁을 벌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 계열사 임원은 "솔직히 미전실의 지시를 받는 게 의사 결정 책임을 분산하는 측면에서는 더 편하기도 했다"면서 "과연 삼성 CEO와 임원들이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 시스템을 정착시킬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또 하나 골칫거리는 임원 인사다. 과거 미전실은 사장단(부사장 이상)뿐 아니라 계열사 임원 인사까지 직접 관장했다. 하지만 지금은 정기 인사는커녕 계열사로 돌아온 미전실 출신 임원 인사도 마무리하지 못하고 있다. 삼성생명의 경우 미전실 금융일류화추진팀 임원과 간부들이 원대 복귀함에 따라 대규모 조직 개편이 필요한 상황이지만 선뜻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는 이재용 부회장의 구속 사태도 주요 요인이 되고 있다. 삼성 관계자는 "갑작스럽게 미전실이 해체되는 바람에 인사나 투자 등 각 사 체제에 대한 아무런 대비를 못 한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