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현지 시각) 노르웨이 오슬로 증시에선 세계 2위 시추업체인 시드릴(Seadrill) 주가가 장 개장과 함께 곤두박질쳤다. 주가는 장중 6.39크로네(840원)를 기록하며 이틀 새 54% 폭락했다. 앞서 4일 열린 미국 뉴욕 증시에서도 시드릴 주가는 55% 폭락한 0.74달러에 마감했다. 시드릴은 '노르웨이 선박왕'으로 불리는 존 프레드릭슨(Fredriksen)이 소유한 석유 시추업체다. 이날 주가 폭락은 100억달러가 넘는 채무 조정이 난항을 겪으면서 파산 가능성이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그리스의 글로벌 시추선사인 오션리그(Ocean rig)도 지난달 뉴욕 법원에 파산 보호 신청을 했다.

최악의 경영난으로 대규모 구조조정을 진행 중인 한국 조선(造船)업이 또다시 예상치 못한 암초를 만났다. 두 업체가 파산하면 한국 조선 업체들은 두 회사로부터 수주받아 만들고 있는 해양 플랜트(바다에서 원유·가스를 뽑아내는 구조물)의 잔금 23억달러(약 2조6000억원)를 날릴 수도 있다. 한국 조선업을 최악의 위기로 몰아넣었던 해양 플랜트 악몽이 여전히 끝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저유가 장기화로 다른 시추 업체 역시 심각한 자금난을 겪고 있는 만큼 '시드릴 쇼크'는 글로벌 해양 플랜트 산업 전체에 연쇄 타격을 줄 가능성도 있다. 대우조선해양에 대해 5조8000억원을 추가 투입해 겨우 가닥을 잡아가는 우리 조선업 구조조정마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시드릴 쇼크'의 가시권에는 삼성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이 있다. 두 업체는 2013년 시드릴로부터 드릴십을 2척씩 수주했다. 삼성중공업은 2013~2014년 오션리그에서도 드릴십 3척을 수주했다. 계약 당시에는 2015년부터 순차적으로 인도할 예정이었지만 줄줄이 연기됐다.

지난달 31일 삼성중공업이 시드릴에 인도 예정이던 드릴십 2척도 또다시 연기됐다.

조선 업체들은 해양 플랜트의 경우 보통 총계약액의 20~30%를 선수금으로 받고 잔금은 선박을 완성해 인도할 때 받는다. 삼성중공업·대우조선 두 회사가 받은 선수금은 12억7600만달러 정도다. 23억달러(2조6000억원)가 날아갈 수 있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삼성중공업은 이날 "시드릴 등이 파산해 지급 불능에 빠져도 건조 중인 드릴십은 다른 업체에 팔면 손해는 없다"는 입장을 내놨다. 하지만 글로벌 상위 5개 시추선사가 보유한 드릴십 200척 중 가동 중인 것은 140척 정도이다. 익명의 한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지금도 놀고 있는 드릴십이 넘쳐나는데 누가 새로운 드릴십을 사들이겠는가"라고 말했다. 업계 관계자는 "건조를 마치고 인도가 지연되면 유지 보수 비용에만 연간 1000억원 넘게 들어간다"고 말했다.

◇송가·소난골에 이어 이번엔 시드릴… 해양 플랜트 부실 왜 자꾸

해양 플랜트는 한때 우리 조선 업계를 먹여 살릴 효자로 꼽혔다. 2010년 이후 '세계 최초', '세계 최대'라면서 해양 플랜트를 잇달아 수주해 2008년 금융 위기로 수주가 급감하던 때 가뭄 속 단비 역할을 했다. 유가 100달러 시대가 오자 세계 메이저 석유 회사들이 심해(深海) 유전 개발에 앞다퉈 나서면서 해양 플랜트 발주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2012~2013년 조선 대형 3사의 전체 수주액 90%가 해양 플랜트일 정도였다. 하지만 해양 플랜트는 건조 과정에 설계 변경, 공정 관리 실패로 비용이 눈덩이처럼 늘면서 한국 조선사에 천문학적 부실을 안겨준 주범이 됐다. 2015년에만 조선 3사는 해양 플랜트 부문에서 8조원가량 손실을 봤다. 대우조선해양의 '송가 프로젝트'가 대표 사례이다. 2011~2012년 노르웨이 시추업체 송가 오프쇼어에서 극지(極地)형 해양 플랜트 4척(1척당 약 6000억원)을 수주했다가 1조원 안팎의 손실을 냈다. 경험이 없는 유럽 중소 업체에 설계를 맡기면서 110차례나 설계를 변경해야 했기 때문이다. 건조 능력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채 수주에만 열을 올린 결과였다.

여기에 유가가 배럴당 50달러 이하로 급락하면서 해양 플랜트를 만들어 놓고도 돈을 받지 못하거나 연기되는 사례도 잇따랐다. 원유 시추 작업은 유가가 최소한 배럴당 60~70달러 이상이어야 이익이 나는 구조다. 하지만 미국 투자은행 JP모건은 최근 "미국 셰일가스 양산과 원유 생산 증가 등으로 2017~2018년 유가는 배럴당 55달러 안팎을 유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당분간 해양 시추는 경제성이 없다는 의미다.

아프리카 앙골라 국영 석유 회사인 소난골(Sonangol)은 대우조선에 드릴십 2척을 발주한 뒤 자금난을 이유로 인수를 거부했다. 대우조선은 아직도 잔금 9억9000만달러(약 1조원)를 받지 못하고 있다. 작년 말 미주 지역 선사도 대우조선해양에 발주한 드릴십 2척(12억달러·1조3000억원) 인도를 연기했다.

◇아직도 수주 잔량 48조원…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해양 플랜트 특성상 유가 급락이나 설계 변경에 따른 공사 지연, 발주사 사정에 따른 인도 연기나 계약 파기와 같은 돌발 변수는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 조선 3사의 해양 플랜트 의존도는 너무 높다. 전체 수주 잔량 826억달러 가운데 해양 플랜트가 절반이 넘는 423억달러(약 48조원)이다. 최근 세계 최대 석유 회사인 엑손모빌은 심해(深海) 유전 사업을 축소하는 등 해양 플랜트 시장은 더욱 위축되고 있다.

'시드릴' 파산 위기로 정부가 추진 중인 조선산업 구조조정도 적지 않은 혼란이 불가피해 보인다. 정부는 대우조선에 5조8000억원을 지원해 살린다는 방침이다. 하지만 시추업체 파산 등 악화된 외부 환경은 채권자들의 지원 결정에 악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정부는 '시드릴' 파산의 영향이 제한적일 것으로 본다. 금융위 관계자는 "시드릴이 발주를 취소하더라도 이미 30%의 선수금을 받았고, 건조를 마무리하고 나서 다른 회사에 매각하는 것도 가능하다"며 "시드릴 때문에 대우조선 자금난이 악화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