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선 현대자동차 부회장은 지난달 28일 베트남을 처음으로 방문했다. 이번 출장길에서 정 부회장은 현지 상용차 시장 현황을 점검하고 공장 증설 현장을 둘러봤다. 현대차는 현재 베트남에 450억원을 투자해 상용차 조립 공장을 증설하고 있다. 공사가 마무리되면 연간 생산 규모는 1만대에서 3만대로 늘어난다.

재계에서는 정 부회장의 첫 베트남 출장 목적이 단순히 현지 상용차 공장을 둘러보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우리나라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를 두고 중국 정부의 노골적인 경제 보복이 잇따르면서 중국에 치우친 생산시설을 동남아로 다변화하려는 포석이 아니냐는 분석이다. 정 부회장은 이번 출장에서 쩐다이꽝 베트남 국가주석을 예방하고 현지 투자 확대와 사회공헌 활동 방안에 대해 논의했다.

아세안(ASEAN·동남아시아 국가연합) 국가들의 자유무역협정 일정에 따라 오는 2018년이 되면 동남아 국가들간의 역내 자동차 관세가 폐지된다. 이에 따라 현대차는 베트남에서 생산한 차량을 관세 없이 다른 동남아 국가들로 수출할 수 있다.

중국의 사드 보복이 장기화할 가능성이 커지면서 중국 의존도가 높은 국내 수출 기업들이 ‘넥스트 차이나' 찾기에 속도를 내고 있다. 특히 지난해 기준 6억5000만명의 인구에 국내총생산(GDP) 2조3000억달러 규모의 거대 시장으로 떠오른 동남아시아가 새로운 ‘엘도라도’로 부상하고 있다.

재계 한 관계자는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장은 이미 생산기지와 소비시장으로 부상하고 있었다"며 “중국의 사드 보복을 계기로 동남아시장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는 상황이다"고 말했다.

◆ IT부터 화학·전선까지…베트남 진출 잇따라

최근 사드 배치에 따른 중국의 경제 보복이 심화되면서 많은 국내 기업들이 베트남을 비롯한 동남아 시장 진출 확대로 새로운 기회를 모색하고 있다. 사진은 베트남 하노이 도심에서 한 과일 행상 뒤로 신호 대기 중인 차량들

국내 기업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진출하는 동남아 국가는 베트남이다. 이미 IT(정보기술)를 비롯해 화학, 타이어 등 다양한 업종의 제조업체들이 중국 보다 저렴한 인건비의 생산기지로 베트남을 택했다. 베트남이 한국 제조업체의 생산기지로 떠오르면서 3위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지난해 상반기 우리나라의 베트남 수출액은 151억7900만달러로 중국(583억7900만달러)과 미국(343억3100만달러) 다음이었다. 한국의 베트남 수출액 80%가 최종 생산을 앞둔 중간재다.

수출입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6월말 기준 베트남에 진출한 한국 기업은 4054개로 미국, 중국에 이어 3위를 기록했다. 2015년에는 역대 최대인 514개의 법인이 진출해 15억달러를 투자했다. 초기에 베트남에 진출했던 기업은 주로 노동집약 산업인 섬유업체였지만, 최근에는 전자와 화학, IT 등 고부가가치 산업이 주를 이루고 있다.

베트남 북부 박닛성에 위치한 삼성전자 제1공장 전경

삼성전자는 2014년부터 2년여에 걸쳐 중국에 있던 스마트폰과 가전제품의 생산시설을 베트남으로 이전했다. 삼성전자는 현재 하노이 동부에 위치한 박닌성과 타이응웬성 등 2곳에서 공장에 운영하고 있다. 한국에서 반도체와 평판디스플레이, 센서 등 중간재를 베트남으로 공급한 뒤 이곳에서 완제품으로 가공해 제3국에서 수출하는 구조다.

삼성전자가 움직이면서 삼성디스플레이와 삼성전기, 삼성SDI 등 계열사들도 베트남으로 모이고 있다. 삼성디스플레이는 지난 2014년 베트남 북부 박닌성의 삼성전자 제1 스마트폰 공장 인근에 10억달러를 투자해 모바일용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패널 모듈 생산공장을 세웠다. 삼성디스플레이는 지난해 투자규모를 30억달러로 대폭 늘린데 이어, 올해 2월에는 25억달러를 추가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삼성디스플레이는 충남 아산에서 만든 OLED 패널을 베트남 공장으로 공급해 각종 회로를 붙인 모듈로 조립한 뒤 현지 삼성전자 스마트폰 공장에 납품한다. 추가 투자를 통해 현지 OLED 모듈 생산 능력을 대폭 확대해 최근 늘어나는 OLED 스마트폰 수요에 대응할 계획이다.

화학업체들 역시 베트남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2007년부터 베트남 호치민에서 타이어코드와 스판덱스 등을 생산 중인 효성은 지난달 베트남 정부와 12억달러 규모의 폴리프로필렌(PP), 프로판탈수소화(PDH) 공장을 건설하는 내용의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LS전선의 베트남 법인인 LS전선아시아의 공장에서 조업 중인 근로자

LS전선은 베트남 현지 합작법인인 LS전선아시아에 대한 투자를 확대해 동남아 시장 공략을 강화하고 있다. LS전선아시아는 지난 2월 32억원을 투자해 광케이블 생산라인을 증설한데 이어 계열사인 가온전선과도 합작해 미얀마에 진출하기로 했다. 두 회사는 올해 합작법인 설립을 마무리한 뒤 2018년 미얀마에서 전력 케이블 공장을 준공할 계획이다.

◆ 왜 동남아인가…저렴한 인건비에 잇따른 기업우대 혜택으로 투자매력 높아

국내 수출기업들이 잇따라 베트남 등 동남아시장으로 눈길을 돌리는 것은 이들 국가가 중국에 비해 인건비가 저렴한 데다 적극적인 외국기업 유치 활동으로 현지 투자환경도 우호적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인건비가 매년 상승해 한국과 중국의 노동비용 격차는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중국의 최저임금 수준은 2010년 한국의 40.3%에서 2015년 59.2%까지 올라왔다. 이 때문에 많은 한국 제조업체들이 중국보다 저렴한 동남아시아를 찾고 있다. 사드 배치에 따른 중국의 경제 보복 이후 이런 분위기는 더욱 강해지고 있다.

2010~2015년 한국과 중국의 최저시급 비교

동남아 국가들의 기업우대 조치도 국내 제조업체들을 끌어당기는 요인으로 꼽힌다. 베트남의 경우 지난 2008년 삼성전자가 처음으로 진출할 당시 북부 박닛성에 공장 부지를 무상으로 제공했고 50년 동안 법인세를 우대해 주는 파격적인 혜택을 제공했다.

코트라에 따르면 베트남은 20%의 법인세율을 적용하고 있지만 2억8500만달러 이상을 투자하는 외국계 기업에는 첫 투자시점 이후 4년간 법인세를 면제해 준다. 9년간은 법인세율을 10%만 적용하고 이후 15년 동안 법인세율이 변동해도 바뀐 세율의 절반만 내도록 우대한다.

삼성전자의 협력업체인 자화전자의 베트남 공장에서 직원들이 삼성전자의 스마트폰에 들어갈 부품을 생산하고 있다.

태국은 지난해 3월 법인세율을 30%에서 20%로 10%포인트 내렸고, 필리핀도 현행 30%인 법인세율을 올해 말까지 25% 수준으로 낮출 예정이다. 인도네시아는 현행 25%인 법인세율을 지속적으로 낮춰 싱가포르가 적용 중인 17% 수준까지 인하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일본은 저렴한 인건비와 우호적인 투자환경을 갖춘 동남아 시장으로 눈을 돌려 중국 리스크를 줄인 경험이 있다. 2012년 센카쿠 열도를 둘러싼 분쟁으로 중국 내 반일감정이 커지자 도요타와 혼다 등 중국에 진출했던 일본 자동차 회사들도 큰 어려움을 겪었다.

반일 감정에 따른 피해가 커지자 도요타는 2013년 인도네시아에 2억3000만달러를 투자해 생산기지를 건설했고 혼다도 5억5000만달러를 들여 태국에 새로운 거점을 마련했다. 이후 중국 내 반일감정이 차츰 사그라들어 일본 자동차업체들은 중국 시장 판매량을 회복되면서 오히려 아시아시장 점유율을 확대하는 효과를 거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