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4일 오전 10시. 빅마켓 영등포점 6층 롯데리테일 아카데미 대회의장에서 롯데쇼핑의 제47기 정기주주총회가 열렸다. 재무제표 승인, 정관 변경 등 5건의 안건이 별다른 이견 없이 통과됐다. 강희태 롯데백화점 사장·윤종민 경영혁신실 HR팀장(사장)이 사내이사(등기이사)로 신규 선임됐다.

20여 분 만에 조용히 마무리된 주총지만 이 주총이 가진 함의는 크다.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이 1970년 롯데쇼핑(023530)창립 이후 47년만에 사내이사에서 물러났다. 이번 주총 전까지 롯데쇼핑은 신격호 총괄회장과 이원준 롯데그룹 유통BU(Business Unit)장 공동 대표이사 체제였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2015년 7월부터 불거진 신동빈 신동주 형제간 경영권 분쟁도 사실상 마무리 국면에 접어들었다. 재계 관계자들은 “올해부터 ‘신동빈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릴 것”이라며 “그룹 거버넌스(지배구조) 개편 작업에도 속도가 붙을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신 회장은 롯데쇼핑을 비롯해 호텔롯데, 롯데제과, 롯데케미칼, 롯데칠성음료, 캐논코리아비즈니스솔루션 등 6곳의 주요 계열사 사내이사를 맡고있다.

◆ 신동빈 시대 본격 개막거버넌스 개편 박차

지배구조 개편은 신 회장이 강조해온 그룹 차원의 핵심 과제 중 하나다. 경영권 분쟁, 검찰조사 등 최근 몇 년간 계속된 그룹 차원의 위기가 지배구조 문제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사드 역풍 등 외부 변수에 잘 대응하기 위해서도 지배구조 개편을 통한 리더십 정립이 시급하다.

신 회장은 2015년 12월 사장단 회의에서 “그룹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신속한 변화 대응, 그룹 거버넌스 강화, 소통과 협력에 힘써달라”고 주문했다. 작년 11월 30일 사장단 회의에서도 “준법경영위원회 설치, 지배구조개선 등 경영쇄신안이 제대로 실행될 수 있도록 노력해달라”고 재차 강조했다. 작년 10월 25일에는 대국민 사과를 통해 “투명한 지배구조를 만드는데 전력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왼쪽부터)과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신동주 전 롯데홀딩스 부회장, 신격호 총괄회장과 사실혼 관계인 서미경씨 등이 지난 20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재판에 출석하고 있다.

롯데그룹은 2015년 11월 지배구조개선TF를 만들었다. 당시 자산규모 3000억원 이상 모든 계열사에 사외이사를 두고, 1조원 이상의 회사에는 이사 총수의 4분의 1 이상을 사외이사로 선임하는 방침을 실행했다.

작년 10월에는 회장 직속 상설 조직인 준법경영위원회(Compliance Committee) 설치, 호텔롯데 상장 추진, 지주회사 전환 등 지배구조 관련 경영쇄신안을 내놨다. 롯데그룹 한 임원은 “지난 2월 조직 개편과 인사를 통해 그룹을 4개 BU 체제(유통, 화학, 식품, 호텔서비스)로 전환했다”며 “검찰 수사 등으로 주춤했던 지주회사 전환 준비도 곧 궤도에 오를 것”이라고 했다.

◆ 경영권 분쟁 마무리 국면준법경영위 출범

지배구조 개편의 시발점이 된 경영권 분쟁은 마무리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신동주 SDJ코퍼레이션 회장(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은 지난 2월 22일 롯데쇼핑 보유 주식 중 173만883주(6.88%)를 처분했다. 그 결과 지분율이 7.95%로 줄었다. 핵심 계열사의 주식을 대량 처분한만큼 사실상 분쟁이 마무리됐다는 관측이다. 신동빈 회장의 롯데쇼핑 지분율은 13.46%다.

이상헌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광윤사를 제외한 일본 및 한국 롯데 계열사 이사회를 신동빈 회장이 장악하고 있고, 계열사간 내부 지분율이 높기 때문에 신동주 전 부회장이 다른 롯데 계열사 지분을 매수하기도 힘들다”며 “경영권 분쟁이 사실상 마무리됐기 때문에 롯데의 지배구조 개편 행보가 더욱 빨라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조선일보 DB

지배구조 개편 관련 핵심 공약으로 내세운 준법경영위원회도 최근 출범했다. 지난 2월 21일 조직 개편과 임원 인사를 단행하며 그룹 컨트롤타워인 정책본부를 새로운 두 개 조직(경영혁신실, 컴플라이언스위원회로)으로 나눴다. 컴플라이언스(준법경영)위원회는 준법경영·법무·감사 기능을 수행한다. 또 그룹 차원의 준법경영 관련 규칙과 정책을 세우고, 각 계열사의 준법경영 실행 여부를 점검할 예정이다. 이병희 롯데그룹 경영혁신실 상무는 “컴플라이언위원회 위원장을 외부에서 영입하기 위해 검토 중”이라며 “명망있는 법조계 인사가 위원장을 맡게 될 것”이라고 했다.

준법경영위원회가 제대로 기능하려면 책임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준법경영위원회가 그룹 의사 결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면, 그에 따른 책임도 져야한다”며 “준법경영위원회에 권한과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부여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고 했다.

◆ 순환출자 해소·지주사 전환·호텔롯데 상장 과제

지배구조 개편을 위해 풀어야할 숙제는 ▲순환출자 고리 해소 ▲지주회사 전환 ▲호텔롯데 상장 등 크게 세가지다. 이들 과제는 서로 밀접하게 얽혀 있어 만만치 않은 작업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롯데그룹은 최근 몇년 사이 416개의 순환출자 고리 중 84%를 해소했다. 그러나 아직 67개의 순환출자 고리가 남아있다. ‘롯데쇼핑→대홍기획→롯데정보통신→롯데쇼핑’, ‘롯데제과→롯데푸드→대홍기획→롯데제과’ 등으로 얽혀 있다. 이들 순환 출자 고리를 정리하려면 무엇보다 대규모의 비용이 든다.

조경진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순환출자 고리 중 금액적으로 가장 부담스러운 부분은 롯데제과와 롯데칠성이 보유한 롯데쇼핑 지분 7.86%(247만4543주), 3.93%(123만7272주) 등이다"라고 지적했다. 롯데쇼핑의 덩치가 워낙 크다보니(3월 31일 기준 종가 21만7500원, 시가총액 6조8493억원) 오너 일가나 현재 지주회사격인 호텔롯데 등이 이들 지분을 받아주기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롯데제과와 롯데칠성이 보유한 롯데쇼핑 지분 가치는 3월 31일 종가 기준으로 각각 5382억원, 2691억원에 이른다.

금융투자업계에서는 롯데쇼핑, 롯데제과, 롯데칠성, 롯데푸드를 인적분할한 후 4개 회사의 투자부문을 합병해 지주회사 전환을 시도할 것이란 관측이 나오고 있다.

이런 이유로 금융투자업계에서는 롯데그룹이 롯데쇼핑, 롯데제과, 롯데칠성, 롯데푸드를 투자회사와 사업회사로 인적분할한 뒤 각각의 투자회사를 합병해 지주회사(롯데홀딩스·가칭)를 세울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지주회사 설립으로 자연스럽게 순환출자 고리를 해소할 수 있고, 신 회장이 4곳의 지분을 각각 13.46%(롯데쇼핑), 9.1%(롯데제과), 5.7%(롯데칠성 지분), 2.0%(롯데푸드)씩 보유하고 있어 지배력 확대에도 유리하다는 것이다. 롯데쇼핑, 롯데제과, 롯데칠성, 롯데푸드는 지난 1월 각각 공시를 통해 “지주회사 체제 전환을 위한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지주회사 전환의 마지막 퍼즐은 이 지주회사와 호텔롯데의 합병이다. 호텔롯데 지분을 보유하고 있지 않은 신 회장이 그룹 전체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하려면 합병이 필수적이란 관측이 나온다.

지주회사 전환에 쓸 재원을 마련하려면 호텔롯데 상장도 재추진해야한다. 현재 호텔롯데 상장은 롯데그룹 오너가의 검찰 수사 등으로 잠정 연기된 상태다. 신 회장 등 롯데그룹 대주주 일가는 배임·횡령 혐의로 불구속기소돼 현재 재판을 받고 있는데, 호텔롯데 등 주요 계열사를 활용한 횡령 가능성도 혐의에 포함됐다. 호텔롯데 상장은 일본 롯데의 지분율을 낮추는 효과도 있다. 호텔롯데 지분은 일본 롯데홀딩스(19.07%)를 비롯한 일본 계열사들이 99% 보유하고 있다.

◆ 3세 경영 수업 돌입 관측도

신동빈 시대의 개막과 함께 3세 경영을 위한 준비가 시작될 것이란 관측도 조심스럽게 나온다. 신 회장은 슬하에 장남 유열(31)씨, 장녀 규미(29)씨, 차녀 승은(25)씨를 두고 있다.

신동빈(오른쪽) 롯데그룹 회장이 작년 3월 31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롯데면세점 긴자 매장 개점식에서 참가자와 대화하고 있다. 신동빈 회장의 누나인 신영자(가운데) 롯데복지재단 이사장과 어머니(앞줄 왼쪽 두번째), 신동빈 회장의 아들 유열씨 부부(붉은 원)등이 함께 자리했다.

유열씨는 2015년 결혼 피로연을 통해 처음 언론에 얼굴을 알렸고, 차녀 승은씨는 지난 23일 일본 언론 보도를 통해 오는 5월 일본 민영방송 TBS의 아나운서 이시이 토모히로와의 결혼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이 공개됐다. 한 재계 관계자는 “장남 유열씨는 작년 3월 일본 도쿄 긴자에서 열린 롯데면세점 개장식에 신 회장과 참석하기도 했다”며 “3세가 당장 전면에 나서진 않겠지만 물밑에서 경영 수업을 받게 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