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돌 9단과 인공지능 알파고의 대결 이후 대학가에는 컴퓨터 복수 전공 바람이 불고 있다. 복수 전공자들이 넘쳐나는 바람에 컴퓨터 주 전공자들이 수강 신청에 밀릴 정도다. 조선비즈는 학내 사정을 잘 아는 대학생 인턴 기자 2명과 함께 컴퓨터 복수 전공의 실태를 취재했다. 대학가 풍경은 알파고 쇼크 이후 새 인재 양성에 급급한 대학교육의 단면을 보여준다. [편집자주]

“저는 영문학과인데, 컴퓨터공학과 복수전공 많이 어려울까요?”

한 대학생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이다. 요즘 이 커뮤니티에는 컴퓨터공학과 복수전공을 생각하는 문과생들의 상담글이 심심치 않게 올라온다.

복수전공(혹은 이중전공) 제도는 본인이 전공하는 학과 이외에 타학과를 두번째 전공으로 이수하는 제도로 졸업과 동시에 두 개 이상의 학사학위를 받을 수 있다.

복수전공을 택할 때는 주전공과 연관된 학과 혹은 같은 계열(문과·이과)의 전공을 택해 주전공과의 시너지 효과를 노리는게 보통이지만, 문과생들도 이과 과목인 컴퓨터공학과(이하 컴공) 복수전공에 눈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문과생들이 컴공 복수전공에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인공지능(AI)이 4차 산업혁명을 이끌어 가는 핵심 기술로 떠오르고, 특히 ‘알파고 쇼크’를 겪으며 AI에 대한 관심이 커졌기 때문이다.

또 갈수록 취업문이 좁아지고 기술적 소양과 인문적 소양을 모두 갖춘 소위 ‘융합형 인재’를 찾는 취업 시장 분위기 탓에 조금이라도 더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컴공을 복수전공하는 문과생들이 매해 증가하고있다.

학생들이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연구하고 있다.

하지만 대학은 이런 추세를 전혀 반영하지 않고있다. 문과 출신 학생들도 4년 동안 적게는 12개의 컴공 수업만 들으면 복수전공 학위를 딸 수 있는데, 이는 심도있는 컴퓨터 교육을 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수업량이라는 주장이 나온다.

AI가 차세대 핵심 기술인 만큼 대학은 컴공을 복수전공하는 문과생들에게 맞는 심도 있는 교육 시스템을 마련해 고급 인재를 양성하는 데 힘써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 흥미 따라·스펙 만들려 문과생 사이에서 컴퓨터 공학 인기

문과생들이 컴공 복수전공을 택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창업을 생각 중이거나 취업 때 조금이라도 더 유리하지 않을까 해서, 혹은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관심이 생겨 깊이있게 배우고 싶어 컴공 복수전공을 택하는 경우도 많다.

이화여대에서 컴퓨터공학과를 복수전공하고 있는 A씨(초등교육학과 2학년생)는 “컴퓨터 언어를 알면 각종 프로그램을 탄생시킬 수 있다는 점에 감동을 받았는데, 그 여운이 사라지지 않아 컴공과 복수전공을 택했다”고 말했다.

조선 DB

공대생을 환영하는 취업 시장 분위기 때문에 컴공 복수전공을 택하는 문과생들이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다. 한국고용정보원에 따르면 34세 이하 공학 계열 졸업자의 고용률은 지속적인 상승세를 보여 2015년에는 82.8%를 기록해 전체 전공 계열을 통틀어 고용률 1위를 차지했다. 인문사회 계열은 약 72%로 전체 전공 계열 중 최하위다.

서울 한 대의 사회과학계열 졸업을 앞둔 B씨는 “문과 중에서도 취업률이 높은편인 경영, 경제학 전공 친구들이 컴퓨터공학을 복수전공 해 코딩(coding)까지 배워서 더더욱 ‘취업 깡패’가 되려고 하는 것 같다”며 “공대 복수전공도 하나의 ‘스펙’이 됐다”고 토로했다.

실제로 컴공을 복수전공하는 학생은 늘어나는 추세다. 서울대를 살펴보면 2011년엔 단 한명도 없던 문과 출신 컴공 복수전공생이 2012년 1명, 2013년 4명, 2014년 5명, 2015년엔 22명으로 크게 늘었다. 지난해 1학기에는 23명의 문과생들이 컴공 복수전공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작년 1학기 전체 컴공 복수전공생(36명) 중 문과생 비율은 약 64%로, 경영대가 7명, 사회과학대 7명 그리고 인문과학대가 9명이었다.

조선 DB

연세대학교도 마찬가지다. 연세대 컴퓨터과학과 복수전공 프로그램을 맡은 김선주 교수는 “컴퓨터과학과 복수전공생들의 90% 이상이 인문대 학생들”이라며 “그 전엔 거의 없던 컴퓨터과학과를 복수전공하는 문과 출신 학생들이 최근 3년동안 크게 늘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물론 IT, AI 열풍도 한 몫 했지만 컴공은 실용학문이다 보니 수리, 물리적 배경지식이 비교적 덜 필요하다”며 “그래서 문과생들이 배워볼 만 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고려대학교는 작년 2학기 기준 컴퓨터학과 이중전공에 합격한 36명 중 22명(약 61%)이 문과대학(5명), 정경대학(9명), 경영대학(3명) 등에 소속된 문과 학생들이다.

한양대학교는 작년 컴퓨터공학부 다중전공(복수전공) 신청자 중 문과생 합격자는 전체 합격자 중 약 47%에 달했다. 이는 2015년 39.62%에서 약 7.38% 포인트 증가한 수치다.

◆ 수박 겉핥기 식 컴공 복수 전공…진짜 실력 있는 인재 길러질까

서울대 컴퓨터공학 전공자는 해당 수업 63점을 이수해야 한다. 연세대 컴공 전공자는 66학점을 들어야하고, 한양대 컴공 전공자는 앞서 두 학교보다 많은 87학점을 들어야한다.

하지만 컴퓨터 복수전공자는 수업 이수량이 절반 밖에 안된다. 서울대는 39학점, 연세대, 한양대는 36학점만 이수하면 문과생도 컴공 학위를 딸 수 있다. 고려대와 한국외대는 54학점, 성균관대는 43학점이다. 서울대는 원래 복수 전공 기준이 51학점이었는데, 08학번 이후로 기준이 39학점으로 대폭 낮아졌다. 이는 컴공이 주전공인 학생들 보다 최소 8과목에서 최대 17과목까지 적은 수업량이다.

수업 듣는 컴퓨터공학과 학생들.

서울 한 대학의 컴퓨터공학과 학생은 “컴공생들은 복수전공을 잘 안하는데, 그 이유가 컴공이 워낙 범위가 넓고 많은 공부가 필요해서 다른 전공을 공부할 여유가 없기 때문”이라며 “그런데 복수전공생들이 이렇게 힘든 컴공을 30~40학점만 듣고 학위를 딴다는 건 수박 겉 핥기 식인셈”이라고 말했다.

현재 컴공을 복수전공하는 한 문과 학생은 “컴퓨터공학은 생각보다 배워야할 것들이 너무 많고 학문의 깊이가 깊다”며 “애플리케이션 개발이나 프로그램 제작 등도 직접 해보고 싶지만 원하는 수준만큼은 배울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AI와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등이 차세대 산업으로 주목받으면서 더 나은 인재 양성을 위해 기존 복수전공 시스템을 개선해야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문과생들이 본인의 전공 지식과 컴공 지식을 합해 새로운 분야에서 활약할 수 있게 좀 더 세분화 된 교육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김형주 서울대 컴퓨터공학부 교수는 “복수 전공생들 때문에 컴퓨터 공학 주 전공자들이 수업을 신청하지 못할 정도”라며 “4년에 맞춘 컴퓨터공학 커리큘럼 중 절반만 이수해 전공 자격을 주는 것은 내실 있는 컴퓨터 실력자를 키우기 어렵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복수 전공자들이 증가하는 점을 고려한 새 커리큘럼 마련이 시급하며, 대학 교과과정에 일률적으로 적용된 학칙 개정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조성배 연세대학교 컴퓨터과학과 교수는 ‘트랙(Track)’ 개념을 제시했다. 조 교수는 “예를 들면 ‘빅데이터 트랙’, ‘소프트웨어 응용 트랙’ 등으로 컴퓨터공학을 세분화해서 복수전공생들 자신이 흥미롭다고 느끼는 트랙을 택할 수 있게 한다면 36학점의 수업만 들어도 충분히 특화형 인재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조언했다.

조 교수는 또 “복수전공생들의 학점이 좋다고 프로그래밍 능력이 우수하다고 보긴 어렵다”며 “4년동안 프로그래밍을 열심히 배운 컴공 주전공 학생들과 36학점만 듣고 졸업하는 복수전공생들은 당연히 실전에서 차이가 날 것”이라 덧붙였다.

현재 복수전공 제도가 충분히 잘 운영되고 있어 문제 없다는 의견도 있었다.

김선주 연세대 컴퓨터과학과 교수는 “연세대는 컴공 뿐만 아니라 모든 과의 복수전공 학점 이수 기준이 36학점”이라며 “36학점을 우수하게 이수한다면 충분히 뛰어난 프로그래밍 실력을 갖출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