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그룹은 지난달 말 그룹 인사에서 국회와 공정거래위원회 관련 업무를 맡았던 정책본부 대외(對外) 담당 직원을 14명에서 7명으로 줄였다. 중국의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보복 조치 직격탄을 맞고 있는 가운데서도 주요 부처를 담당했던 직원을 절반으로 줄인 것이다.

롯데의 한 임원은 "2012년 골목상권 침해 논란으로 신동빈 회장이 국회 청문회 출석을 요청받았을 때 그룹 정책본부 내에 국회와 공정위 담당 팀을 각각 신설했는데 이번에 대폭 축소했다"며 "작년 검찰 수사를 받을 당시 약속한 경영 쇄신 방침에 따라 그룹 활동을 계열사로 대거 이관하고 기존 대외 업무 기능은 최소화시켰다"고 말했다.

국내 대기업들이 대외 업무 활동을 대폭 줄이고 있다.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로 삼성이 그룹 대외 업무를 총괄해오던 미래전략실을 전격 해체한 이후 다른 기업들도 국회와 청와대·정부 부처 등과 접촉해 왔던 대외 업무 조직을 축소하고 대외 활동도 자제하는 분위기다. 시민단체나 각종 기부 활동과 연계된 대외 활동도 줄어드는 조짐이다.

삼성 측은 미래전략실 해체 이후 "로비로 비칠 수 있는 어떤 대외 활동도 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입장을 밝혔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앞으로 특정 부서가 그룹 전체 차원에서 정부와 국회를 상대로 활동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현안이 생기면 각 계열사가 알아서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 대기업 임원은 "기업들은 최순실 사태를 겪으면서 정부에서 공식 요청을 받고 지원한 일도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했다"며 "이제는 정부뿐 아니라 각종 공익 단체를 지원할 때도 까다로운 내부 기준을 통과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현대차·SK·LG 등 주요 대기업이 미르·K스포츠 재단 모금을 주도한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를 탈퇴하면서 기업과 정·관계를 잇던 연결 고리도 사실상 단절 상태다.

대외 활동 줄이고 목소리 낮추는 기업들

대통령 선거가 50여 일 앞으로 다가왔지만 재계는 정치권을 향한 정책 제안 활동은 엄두도 못 내고 있다. 최순실 사태 이후 기업들이 목소리를 높이는 것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깊어졌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 문재인·이재명 후보,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 등 차기 대선 주자들이 "정경유착을 근절하겠다"며 재벌 개혁을 공약으로 내건 것도 큰 요인이다. 한 대기업 임원은 "과거 같으면 대선을 앞두고 대외 업무팀을 풀가동할 시기인데, 요즘은 국회나 정치권을 상대로 필요한 법안이나 정책을 채택해 달라고 설득하는 것은 고사하고 대선 향방에 관한 탐문도 못한다"며 "유력 후보들이 대기업에 비판적 입장을 내세우다 보니 납작 엎드려 있다"고 말했다.

전경련 관계자는 "선거 철이면 재계 단체를 중심으로 각종 세미나와 포럼을 열어 정책을 제안하고 기업들의 요구 사항을 정치권에 전달했지만 지금은 일절 중단했다"고 말했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재계 창구 역할을 하는 전경련이 와해 위기를 겪으면서 정부와 기업의 접촉 방식도 달라졌다. 지난 10일 오후 한 대기업 대외 담당 부서에는 한 정부 부처 사무관이 직접 전화를 걸어 "이틀 뒤 10대 그룹 고위 임원들과 장관의 조찬 모임을 추진 중인데 부회장급 임원이 참석하기를 바란다"고 요청한 것으로 전해졌다. 전화를 받은 기업 임원은 "해당 부서 사무관이 기업마다 일일이 전화를 걸어 약속을 잡는다고 했다"며 "과거 같으면 전경련이 나설 일이었지만 최순실 사태 이후에는 정부 부처에서 개별적으로 기업에 연락하고 있다"고 말했다. 재계 관계자는 "개별적으로 일정과 안건을 일일이 조율하는 게 여간 번거롭지 않을 것"이라며 "이제는 기업과 정부·정치권의 만남 자체가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 공무원들 역시 기업에서 만남을 요청해도 "전화로 하자, 자료만 보내라"고 대답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 고위 관계자는 "세종시로 이전하면서 기업과의 접촉이 30% 정도 줄었고, 김영란법 시행 이후 다시 30% 줄었다"며 "최순실 사태까지 겹치며 기업인과 만나는 일이 더욱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재계 관계자는 "만남 자체가 줄어들면서 정부 부처 공무원들이 산업 현장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질 수 있다"며 "결과적으로 이는 앞으로 기업 활동에 부정적인 요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기업들이 필요한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정부를 설득하는 일이 더 어려워질 수 있다는 말이다.

기부·후원금 모금도 앞으로 쉽지 않아

각종 기금을 조성하기 위한 기업의 모금 활동도 위축될 조짐이다. 당장 올해부터 공기업과 민간기업을 대상으로 매년 1000억원을 모금해야 하는 '농어촌상생협력기금' 담당자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이 기금은 FTA(자유무역협정) 체결로 피해를 보는 농어민을 돕기 위해 올해부터 10년간 매년 1000억원을 조성하게 돼 있다. 모금을 맡은 대·중소기업협력재단 관계자는 "최순실 사태 이후 기업들이 극도로 몸을 사리고 있다"며 "개별 기업을 하나하나 만나 설득하려니 여간 일이 아니다"고 말했다.

최순실 사태로 홍역을 앓았던 삼성이 대외 기부에 대해 엄격한 '잣대'를 마련한 것도 기부 금액이 줄어드는 결과를 낳을 가능성이 크다. 삼성전자는 최근 1000만원 이상의 기부금 또는 후원금을 집행할 때 인사·법무·재무·커뮤니케이션팀 팀장이 참여하는 심의위원회 심의를 거치도록 했고, 10억원 이상은 반드시 이사회 의결을 받도록 했다. 재계 관계자는 "그동안 올림픽 후원이나 수재 의연금 등 각종 성금을 출연할 때 재계 1위인 삼성이 금액을 결정하면 다른 기업들이 재계 서열에 따라 후원 액수를 정해왔다"면서 "삼성이 엄격한 기준을 적용해 후원금 규모를 줄이면 다른 대기업들도 축소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올해 들어 대기업들이 소상공인을 지원하기 위해 구입해온 '온누리 상품권'(전통시장 전용 상품권) 구매액이 급감한 것으로 나타났다. 올해 1~2월 삼성·현대차·SK·LG·롯데·포스코·CJ 등 주요 7개 그룹이 사들인 온누리 상품권은 136억1000만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713억3000만원)에 비해 81%나 감소했다.

"기업 대외 활동 투명하게 이뤄지면 돼"

기업의 대외 활동 축소 분위기는 상당 기간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 기업의 대외 활동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강한 데다 기업 내부적으로도 "돈 쓰고 욕먹는 짓을 왜 하는지 모르겠다"는 비판이 만만치 않다. 재계 관계자는 "기업들도 그룹 차원의 거대 대외 조직을 두기보다 계열사별로 필요에 따라 정부와 커뮤니케이션하는 모델을 만들어 가려 한다"고 말했다.

다만 차기 정부가 출범한 이후 정부의 필요에 따라 대기업과 접촉이 다시 늘어날 가능성은 있다. 경제 활성화를 위해서는 대기업의 협조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김병도 서울대 교수(경영학)는 "과거의 잘못된 관행은 바로잡아야 하겠지만, 기업의 사회적 활동까지 위축되어서는 안 된다"며 "차기 정부에서는 기업이 투명하게 대외 활동을 할 수 있는 새로운 관행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