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오전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연세대 의대 산업보건연구소 김치년 교수가 소속 연구원 2명과 함께 '6-1' 생산 라인에 들어가 공기 중 포함된 각종 화학물질 시료를 채취하고 있었다. 1995년 지어진 이 라인은 카메라의 이미지 센서에 들어가는 시스템 반도체를 만드는 공장. 세계 최대 반도체 생산 기지인 기흥·화성 공장의 반도체 생산 라인 10개 중 가장 오래된 시설이다. 기흥 공장은 이른바 '삼성전자 백혈병 논란'이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2007년 3월 숨진 고(故) 황유미씨가 근무했던 반도체 3라인은 현재 전자제품의 광원(光源)으로 쓰는 LED(발광 다이오드) 소자 라인으로 바뀌었다.

기흥 반도체 생산 공장 들어가 보니

김 교수는 삼성전자와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백혈병 가족 대책위 3자(者)가 합의해 작년 6월 출범한 '옴부즈만위원회'에서 반도체 공장의 물리·화학적 물질을 분석·평가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다.

8일 오전 경기도 기흥 삼성전자 반도체 생산라인에서 설비 점검이 진행되는 동안 옴부즈만위원회 연구원들이 어떤 화학물질이 공기 중에 노출되는지 화학물질 시료 채취 작업을 벌이고 있다. 삼성전자가 반도체 공장 핵심 시설을 외부에 공개한 것은 이례적이다.

이날은 생산 라인에 빽빽하게 들어찬 설비 600여 대 중 CVD(화학 증착) 설비 한 대가 점검받는 날. CVD는 실리콘 웨이퍼에 화학물질을 입혀 전기적 성질을 띠게 하는 공정을 말한다. '한 장에 그랜저 한 대 값'이라는 웨이퍼가 쉴 새 없이 투입되는 가운데 정비 직원들은 온몸을 방진복으로 감싸고 방독 마스크와 작업 안경을 쓰고 설비를 점검 중이었다. 평소 자동으로 웨이퍼가 투입되던 설비가 이날은 활짝 열려 있었다. 김 교수팀은 그 옆에서 개인용 시료 포집기 10여 개를 둘러 매고 주변 공기를 빨아들였다. 김 교수는 "공정이 자동화되어 직원들이 화학물질에 노출될 가능성이 낮지만 평소 폐쇄돼 있던 설비를 열고 점검할 때는 환경이 바뀔 수 있어 위험도를 측정하는 것"이라며 "벤젠, 포름알데히드 같은 발암물질, 불임 등을 유발할 수 있는 셀루솔부(용해제의 일종) 계열 물질이 주요 점검 대상"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올 들어 40여 일간 삼성전자 공장을 방문했다. 기흥·화성뿐 아니라 충남 온양의 반도체, 천안의 LCD(액정 표시 장치) 라인을 샅샅이 뒤지다시피 하고 있다. 지난달에는 설비가 들어찬 라인 바닥 아래 공간까지 들어가 공기를 채집했다. 오병민 기흥·화성단지 보건관리팀 상무는 "옴부즈만위가 공개를 요구하는 시설은 100% 접근을 허용하고 삼성은 조사에 일절 간여하지 않는다"며 "최근에는 직원들의 담당 공정 업무, 다루는 물질 등을 담은 문서도 제공했다"고 말했다.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 조사"

삼성전자는 '배제 없는 보상'을 요구하는 반올림과 피해자 보상 문제에 완전히 합의하지 못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2015년 9월부터 160명의 보상 신청을 접수해 현재까지 120여 명에게 보상을 완료했다. 반올림은 이에 대해 예외 없이 모두에게 보상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옴부즈만위는 작년 1월 합의에 따라 환경 조사와 예방책 마련을 위한 작업을 차근차근 진행하고 있다. 김 교수팀은 하절기인 7~8월 한 차례 더 생산 라인을 집중 조사한 뒤 올 연말까지 조사 결과를 옴부즈만위에 제출한다는 계획이다.

서울대 의대 예방의학과 박수경 교수가 이끄는 건강영향조사팀에선 현장 근무자들과 과거 근무 경력자들에 대한 방대한 역학조사를 진행할 예정이다. 발병 환자들과 인터뷰도 예정되어 있다. 반도체 생산 라인에 근무하는 직원들의 혈액 등 생체 시료를 채취해 작업 환경이 신체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알아보는 조사도 처음으로 진행할 계획이다.

반올림 측도 옴부즈만위의 활동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반올림 측은 그러나 "유일하게 우리가 합의해준 사안인데도 옴부즈만위의 조사 진행 상황과 일정을 제대로 전달받지 못하고 있다. 활동 내용을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이철수(서울대 법대 교수) 옴부즈만 위원장은 "민간 기업에 대한 옴부즈만 활동이라는 유례 없는 실험을 하고 있다"며 "삼성이란 특정 기업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전자 산업의 미래가 달린 문제를 최대한 과학적이고 객관적으로 조사해 국민 앞에 공개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