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8일 낮 서울 명동에 있는 돈가스 '무한 리필' 식당. 점심시간이 되자 30석 규모 식당이 가득 차고 대기 행렬이 길게 늘어섰다. 이곳에선 1인당 6900원만 내면 돈가스와 밥을 원하는 만큼 먹을 수 있다. 같은 시각 근처 '즉석 떡볶이' 무한 리필 식당도 '만원사례'를 이루긴 마찬가지. 이 식당을 찾은 회사원 심모(35)씨는 "명동 일대 식당은 싼 데를 좀처럼 찾기 어려운데 여기는 '가성비(가격 대비 품질)'가 뛰어나 자주 찾는다"고 말했다.

28일 서울 명동의 한 즉석떡볶이 무한리필 식당. 경기 악화로 주머니 사정이 나빠지면서, 일정 가격에 무제한으로 음식을 제공하는 점포가 늘고 있다.

'가성비'는 장기 불황을 상징하는 단어다. 지갑이 얇아져 소비 심리는 위축됐지만 여전히 불황 이전처럼 고품격 제품·서비스를 원하는 소비자들을 위해 업체들이 새롭게 선보인 전략이다. 식당뿐 아니라 의류, 공산품, 가전 등 전방위로 확산하고 있어 장기 불황 시대를 관통하는 키워드로 자리 잡고 있다.

무한 리필·대용량… 한국판 '코스파'

한국에 '가성비'가 있다면 장기 불황을 먼저 겪은 일본에선 2000년대 초반 '코스파(cost-performance) 세대'라는 신조어가 유행했다. 비용 대비 효과를 중시하는 젊은 세대를 일컫는 표현으로 '가성비'와 비슷한 개념이다. 일본에서 90년대 이후 장기 불황을 겪으며 등장했던 '다베호다이'(맘껏 먹는다) 식당, '노미호다이'(맘껏 마신다) 주점 등 일정액을 내고 뷔페처럼 먹고 마시는 곳이 인기를 끌었다.

최근엔 가성비를 넘어 '가격 대비 용량이 많다'는 '가용비'란 표현도 등장했다. 빅데이터 분석업체 다음소프트가 최근 2년간 소셜미디어(SNS)에 올라온 글을 분석한 결과, '대용량' '무한 리필' '인간 사료' 등 표현 언급량은 2년 전과 대비해 2배 가까이 증가했다. '인간 사료'란 마치 동물 사료처럼 양이 많고 값이 싸다는 뜻이다. 가용비를 중시하는 소비층이 늘며 저렴한 가격에 대량으로 제품을 구매할 수 있는 창고형 할인 마트 매출도 올랐다. 이마트트레이더스 2016년 매출은 전년 대비 25.6% 성장했다.

2010년대 이후 일본 최대 규동(고기덮밥) 체인 '스키야'는 규동 1인분을 270~ 300엔(약 2700~3000원)에 판매하고 있다. 1990년대만 해도 400엔 이상이던 규동 가격을 오히려 20~30% 낮춘 것. 지난 2013년 문을 연 '이키나리'에선 스테이크 300g 가격이 2000엔(약 2만원)에 불과하다. 고기 품질은 다른 스테이크하우스에 뒤지지 않지만 서서 먹어야 한다. 서서 식사를 하면 고객들 식사 시간이 짧아져 회전율이 높아지고 매장 크기도 줄일 수 있다.

지불한 돈의 가치 뛰어넘는 소비 풍조

일본에서 성업하던 '100엔숍'도 최근 한국에서 인기다. 한국의 다이소 매장은 2012년 850개에서 현재 1150여개로 급성장했다. 일본 3위업체 '캔두'도 지난해 한국에 진출했다. 생활용품업체 관계자는 "매장 매대 구성이 다소 어수선하고 제품들은 세련미가 떨어지는 편이지만 가성비를 중시하는 알뜰 쇼핑족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전했다. 가성비 의류 대명사인 일본 SPA(제조·유통 일괄) 패션 브랜드 유니클로도 한국 진출 10년 만에 연 매출 1조원을 넘어섰다. 안승호 숭실대 교수는 "업체들이 '가성비'가 중요한 판매 요소로 자리 잡으면서 제작비를 아껴 제품·서비스 값을 내리기 위해 갖가지 아이디어를 짜내고 있다"면서 "소비자 관점에서는 품질이 한 단계 발전하는 계기"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