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작년 말 특검 출범 직후부터 3개월째 출국 금지돼 있다. 특검은 그러나 최 회장을 한 번도 조사한 적이 없다. 특검 스스로가 "수사 기간을 고려하면 (삼성 이외) 다른 대기업 수사는 진행하기 다소 불가능해 보이는 게 사실"(14일 브리핑)이라고 했지만, 출금을 해제해주지 않고 있다. 오히려 특검은 최근 최 회장의 출금 기한 만료가 다가오자 한 달 더 연장해 달라고 법무부에 신청했다.

이달 말 만료되는 특검의 수사 기간 연장이 불투명하지만 관성적으로 연장 신청을 한 것이다. 한 해 평균 80~120일을 해외 출장을 다니며 각종 신사업, 인수·합병을 주도했던 최태원 회장은 그사이 수많은 글로벌 사업 기회를 바라만 봐야 했다. 먼저 사업 다각화를 위해 2조원을 들고 뛰어든 중국 화학사 상하이세코 인수전을 위해 중국 출장을 계획했다 취소했다. 1998년부터 거의 매년 참석했던 스위스 다보스포럼(1월)도 못 갔다. 그는 다보스에서 글로벌 기업 회장들을 만나 합작 사업을 성사시킨 사례가 많다.

최준선 성균관대 로스쿨 교수는 "글로벌 시대에 세계시장이 하나가 돼 있는데, 도주 우려가 없는 기업인에 대한 출금 남발은 시대착오적"이라고 말했다. 권태신 한국경제연구원장은 "검사들은 편의대로 출금을 걸겠지만 다른 나라에선 출금당하면 엄청난 범죄자로 인식한다"며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에서 나라 경제가 어떻게 되든 말든 내 할 일만 하겠다는 편의적이고 무책임한 권한 남용"이라고 말했다.

당장 해외 법인이 위기에 몰려 출장이 불가피한 기업 총수도 옴짝달싹 못하고 있다. 작년 11월 정부가 롯데 소유의 성주골프장에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 체계)를 배치하기로 하면서 중국 현지 롯데백화점·마트 등은 고강도 세무 조사와 소방·위생 검사를 받고 있다. 중국 고위층 인맥이 넓은 신동빈 롯데 회장이 직접 가서 대응하고 싶어도 속수무책이다.

신동빈 롯데 회장은 작년 6~10월엔 검찰이, 작년 말부턴 특검이 출금을 걸어 반년 동안 발이 묶여 있다. 롯데는 작년 6월 미국 셰일가스 가공 공장 기공식을 열었지만 이후 큰 진척이 없다. 자금 조달을 위한 현지 금융 조건 협의를 주도했던 신 회장이 못 가고 있어서다. 재계 관계자는 "출국 금지에 대한 이의 신청이나 행정소송이 법으로 보장돼 있지만 밉보일까 봐 못한다"고 말했다. 출입국관리법 4조에는 '법무부 장관은 범죄 수사를 위해 출국이 적당하지 않다고 인정되는 사람을 1개월 이내 기간을 정해 출국 금지할 수 있고, 필요하면 연장할 수 있다'고 돼 있다. 이같이 추상적인 법을 활용해 수사기관은 긴급한 사유가 없는 기업인에 대해 출금을 남용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미국·유럽 등에도 출국 금지 제도가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배임·횡령으로 처벌되는 대다수 기업인 범죄는 대부분 민사소송으로 해결하는 데다 흉악범이 아닌 기업인을 향해 남발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한 대형 로펌 변호사는 "검사들은 구속 기소된 피의자가 1심에서 무죄가 나도 오기로 출금을 해제해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며 "무죄 선고를 받고도 미국 교포와 결혼한 딸 결혼식에도 못 간 의뢰인도 있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