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1일 서울 성동구 성수동에 있는 수제 맥주 업체인 어메이징브루잉컴퍼니 매장에서 전태연(왼쪽) 본엔젤스 파트너와 박희은(가운데) 알토스벤처스 심사역, 김태경 어메이징브루잉컴퍼니 대표가 맥주잔을 앞에 두고 포즈를 취했다. 이들 뒤로 보이는 장치는 맥주를 숙성시키는 발효조다. 벤처 투자업체인 본엔젤스와 알토스벤처스는 수십억원을 이 회사에 투자했다.

미국 실리콘밸리 유명 벤처투자사 알토스벤처스에서 한국 투자를 담당하는 박희은씨는 지난해 여름 페이스북을 보다가 한 맥주 가게에 눈길이 끌렸다. “지인들 페이스북에 매일같이 한 맥주 가게 얘기가 올라왔어요. 좀 뜸해지면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갈수록 더 인기가 높아지더라고요.”

박씨가 궁금했던 곳은 수제 맥주 업체 어메이징브루잉컴퍼니. 서울 성수동과 경기 하남 스타필드에 양조장과 가게를 운영하며, 생산한 맥주를 외부 프랜차이즈 가게에도 납품하는 회사다. 알토스벤처스는 작년 10월부터 본격적인 검토에 들어가 올해 초 투자를 결정했다. 쿠팡·우아한형제들·직방 등 IT(정보기술) 스타트업(초기 창업기업)에 주로 투자해오다 수제 맥주로 눈을 돌린 것이다.

알토스벤처스뿐 아니라 국내 대표 벤처캐피털 회사인 본엔젤스도 어메이징브루잉컴퍼니에 함께 투자했다. 본엔젤스는 게임업체 네오위즈를 공동 설립하고 검색업체 첫눈을 창업한 장병규 대표가 네이버를 떠나 만든 스타트업 투자회사다. 두 회사의 투자액은 각각 수십억원 선으로 알려졌다.

◇투자자들 입맛 다시는 맥주시장

최근 벤처캐피털 회사의 수제 맥주 투자가 잇따르고 있다. IT 벤처 위주로 투자하던 국내·외 대표 벤처캐피털 회사들의 눈에 빠르게 성장하는 수제가 들어온 것이다. 작년 말 에이치비인베스트먼트는 충북 음성에 공장이 있는 코리아크래프트브류어리에 50억원을 투자했고, 미래에셋벤처투자는 강남에서 수제 맥주 가게로 시작한 플래티넘맥주에 약 30억원을 투자했다. 이코노미스트 특파원 출신 다니엘 튜더가 만든 이태원 더부스브루잉컴퍼니도 IBK캐피털 등으로부터 지난해 30억원을 받았다.

벤처 투자자들은 “수제맥주 시장의 성장성에 매료됐다”고 말한다. 박희은씨는 “미국은 전체 시장에서 수제 맥주 비율이 13%이지만 우리는 아직 1% 정도”라며 “미국이 한 자릿수 초반에서 불과 5~7년 만에 10%대로 성장한 것을 보면 우리는 더 빨리 시장이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 맥주 시장 규모는 약 5조원 수준이다. 10% 정도만 수제 맥주가 차지하더라도 5000억원에 이르게 된다.

전태연 본엔젤스 파트너는 “지금 맥주 시장은 마치 스마트폰 시장에서 아이폰이 처음 등장했던 때처럼 판이 흔들리고 있다”며 “시장을 선점하는 회사라면 연 매출 1000억원 규모인 국순당보다 더 커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업종보다 성장성에 초점

최근 들어 벤처 투자 업계는 화장품, 교육업체 등으로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국내 산업의 경쟁력이 강해 성장이 기대되는 분야라는 게 공통점이다. 업계에서는 수제 맥주도 국내 시장을 발판으로 해외 진출이 가능하다고 본다.

그동안 투자를 집중했던 게임, 숙박예약·배달·부동산 중개 등 O2O(온라인·오프라인 연계사업) 등에서 큰 재미를 못 본 것도 시야를 돌리게 된 배경으로 꼽힌다. 모바일 게임 쿠키런를 만든 데브시스터즈와 애니팡을 낸 선데이토즈 등이 히트작을 앞세워 증시에 상장했지만, 지난해 실적과 주가가 반 토막 나면서 투자 업계는 자금 회수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투자사 관계자는 “O2O 분야도 선두권 업체 몇몇을 제외하면 투자금을 회수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라며 “자체 성장은 물론 M&A(인수·합병) 기회도 많다는 판단에 수제 맥주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올 1월 패션업체 LF가 수입 맥주 유통업체 인덜지를 인수했고 이에 앞서 진주햄이 1세대 수제 맥주 회사 카브루를 인수했다. 신세계나 유명 연예기획사YG엔터테인먼트가 진출하면서 시장 저변도 넓어지고 있다. 이귀진 에이치비인베스트먼트 본부장은 “해외에서는 최근 3~4년 사이에 커피 전문점에 대한 투자도 활발하다”며 “국내에서도 최근 들어 업종을 따지기보다 성장성을 위주로 투자 결정이 이뤄지는 분위기”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