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셔츠 바람으로 시작해서 3대 만에 도로 셔츠바람으로(Shirtsleeves to shirtsleeves in three generations)’라는 영어 속담이 있다. 미국, 영국, 일본 등 여러 나라에 비슷한 속담이 있다. 우리 말로 하면 ‘부자 3대 못간다’는 의미다.

이를 뒷받침하는 연구 결과도 있다. 가족기업 중 2세대로 이어지는 경우는 30% 정도라고 한다. 가족기업의 70%가 자식 세대로 넘어가기 전에 청산되거나 매각된다는 것이다. 손자 세대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12%, 증손자 세대 이상은 3%에 지나지 않는다.

가족기업의 수명(壽命)이 특별히 더 짧은 것은 아니다. 일반기업이 주축을 이루는 S&P500 기업의 수명은 1958년 61년에서 최근 20년 안팎으로 줄었다고 한다. 미국 상장기업의 평균 수명은 30년, 포천 500대 기업의 평균 수명은 40~50년 정도라는 또다른 연구들도 있다.

인간의 수명이 계속 늘어나고 있는 것과는 달리 기업의 수명은 갈수록 짧아지는 추세다. 기업 인수합병(M&A)이 활발해진 것과 함께 기술과 시장의 변화 속도가 빨라졌기 때문이다. 기술과 제품의 수명이 줄어들면서 기업의 수명도 단축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례적으로 장수(長壽)하는 기업도 적지 않다. 일본에는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기업이 2만개를 넘는다. 1000년 이상 초장수 기업도 있다. 유럽에도 수백년 이어온 기업들이 꽤있다. 이들 장수기업은 대부분 비상장 가족기업이다. 성장보다 안정을 중시하고 있어 기업 규모도 대체로 작은 편이다.

가족기업 중에는 여러 세대를 이어가면서 다국적 대기업으로 크게 성장한 경우도 있다. 에릭슨(정보통신), 사브(자동차·비행기 엔진), 스카니아(트럭), 일렉트로룩스(가전) 등 스웨덴 주요 대기업들을 소유하고 있는 발렌베리 그룹이 대표적이다. 가족기업의 특성을 유지하면서 이렇게 성공한 사례는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다.

한국 경제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재벌 대기업의 상당수가 3~4세 경영 시대를 맞고 있다. 기업이 계속 성장하면서 3~4세대를 이어가는 것은 자랑할만한 성공 스토리다. 그러나 달리 보면 기업의 수명과 지속 가능성을 둘러싼 불확실성이 훨씬 커진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자칫 한국 경제의 미래를 위협하는 불안요인이 될 수 있다.

유럽의 가족기업들은 오랫동안 기업이 장수할 수 있는 지배구조와 시스템을 발전시켜왔다. 예를 들어 스웨덴 발렌베리 그룹과 스웨덴 태생의 네덜란드 가구업체인 이케아, 덴마크 기업들인 머스크(해운), 레고(완구), 칼스버그(맥주), 노보 노르디스크(제약) 등 북구(北歐) 기업 중에는 창업자가 설립한 재단이 최대 주주인 경우가 적지 않다.

세계 최대 해운회사인 머스크의 경우 ‘AP 묄러 & 채스틴 맥키니 묄러 재단’이 의결권의 50.6%, 또다른 묄러 가족재단이 13.5%의 의결권을 갖고 있다. 창업자 지분을 대부분 재단에 넘겨 가문(家門)의 공동재산으로 관리하면 후계자들의 지분 싸움을 방지할 수 있다. 기업이 다른 기업에 넘어가지 않도록 견고한 방어벽을 쌓는 효과도 있다.

엄격한 후계자 선발 시스템도 빼놓을 수 없다. 부모 도움 없이 혼자 힘으로 명문대를 나오고, 외부 다른 기업에서 근무하면서 역량을 입증하는 것같은 까다로운 기준을 통과해야만 기업 경영에 참여할 수 있는 곳이 많다. 한국처럼 가족이라고 해서 모두 한 자리씩 차지하는 경우는 드물다.

여기다 적극적인 사회공헌으로 반(反)기업 정서를 불식시키고 있다. 발렌베리 그룹의 경우 올해 설립 100주년이 되는 ‘크누트 & 알리스 발렌베리 재단’이 기초과학 연구에 대한 파격적인 지원으로 성가가 높은 것을 비롯해 모두 11개 재단이 사회공헌 활동을 하고 있다.

한국 대기업들은 이 부분에서 갈 길이 멀다. 아직도 상속에 대한 인식이 과거 농경사회에서 자식들에게 농토와 재산을 나눠주던 수준에 머물러 있다. 후계자 선정을 위한 체계적인 검증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경우도 거의 없다. 제품은 글로벌 경쟁력을 자랑하지만 경영권 승계 시스템은 여전히 전근대적이다.

이재용 부회장의 구속 등 최근 삼성그룹이 겪고 있는 고난 역시 이와 무관치 않다. 특검이 제기한 여러 혐의를 둘러싼 논란과 시비에 대해서는 법원의 판단을 기다려봐야 한다. 그러나 판결이 어떻게 나오든 지배구조의 취약성이라는 근본 문제는 그대로 남는다.

다른 대기업들도 다를 게 없다. 그래서 3세, 4세 경영시대가 더 불안하게 느껴진다. 내부적 한계와 외부의 제약·압력이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알 수 없다. 이미 곳곳에서 파열음이 나고 있다. 그러나 고르디우스의 매듭처럼 복잡하게 얽힌 부분이 많아 해결 방안을 찾기가 쉽지 않다.

한국적 경영 시스템은 과거 경제 발전 과정에서 기업들이 나름대로 적응하고 대응한 결과다. 그래서 하루 아침에 쾌도난마식 해법이 나오기 힘들다. 역사와 문화, 법과 제도의 차이를 무시한채 외국의 성공 사례를 들먹이고, 재벌 개혁의 당위를 내세우는 것으로 될 일이 아니다. 기업 생태계 전반에 대한 국가적 고민이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