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지주회사 전환'을 검토해 온 현대자동차·SK·롯데 등 대기업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계열사 합병 과정에서 순환출자 문제 등이 발생하지 않는지, 수시로 공정거래위원회와 협의해야 한다. 하지만 지난 17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구속된 후, 이들 기업 대관(對官) 부서들은 그동안 해온 정부 관련 업무들을 전면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정부 주도나 정부 측 협조 요청으로 진행해 온 사업도 다시 들여다보고 있다. 5대 그룹의 한 담당자는 "극단적으로는 정부 주도 친환경 기술 개발에 수천억원을 투자하기로 했는데, 혹시 이런 것이 나중에 지주회사 전환을 위한 뇌물 공여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지도 재점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순실 게이트'와 이 부회장 구속으로 기업과 정부 관계가 급속히 얼어붙고 있다. 특히 대관업무는 거의 마비되고 있다. 기업 대관은 국회나 정부 부처 등을 상대로 기업의 입장을 전달하고 관철시키는 역할을 한다. 로비스트가 합법화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신규 사업 또는 신규 투자를 할 경우, 관련 법률이나 규제를 만들거나 고치는 대관업무는 기업에 필수 부서이다. 하지만 이 부회장의 구속은 대관 업무에 직격탄을 날리고 있다.

이번에 이 부회장은 옛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발생한 '신규 순환출자 문제'를 해소하려고 벌인 대관 활동에 뇌물 공여 혐의가 적용돼 구속으로 이어졌다.

재계 관계자는 "기업 입장에선 정상적 경영활동으로 볼 수 있는 내용"이라며 "이런 것까지 문제 삼는다면, 기업은 복지부동하거나 과도하게 경직된 관료 앞에서 손발이 묶인 채 정부가 시키는 대로만 해야 할 판국"이라고 말했다.

'최순실 게이트'와 '부정청탁금지법(일명 김영란법)'이 겹치면서 정부와 기업 간 채널은 위·아래가 모두 막히고 있다. 그동안 기업은 정부 부처의 실무급에서 '책임' 등을 이유로 결정을 미루거나 규정을 과도하게 적용하면 고위급을 접촉해 재차 설득하는 방식으로 업무를 추진해왔다. 하지만 작년 9월 '부정청탁금지법' 시행 후 실무 공무원과 기업 담당자 간 만남은 확연히 줄어든 상황에서 이번 '이재용 구속' 사태까지 맞이하면서 "일단 기업인들은 피하고 보자"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대기업 관계자는 "규제만 풀면 새로운 사업을 할 수 있겠다는 아이디어가 나와도 건의할 곳이 사라지고 있다"면서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기업뿐 아니라 산업 전체가 타격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민관 협력 사업도 기업엔 부담이 될 수 있다. 올해 정부 주도로 진행 중인 10조원 가까운 에너지 신사업에는 민간기업이 3조2000억원을 투자한다. 하지만 앞으로는 기업 입장에서 정부 사업에 협조하는 것도 꺼릴 수밖에 없다. 이번 특검 수사에서는 정부가 문화 융성을 명분으로 추진했던 미르·K스포츠재단에 내놓은 출연금을 모두 뇌물죄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재계에선 무엇보다 공무원들의 경직된 법 적용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실무 공무원들이 보신(保身) 차원에서 기업에 대해 가장 엄격한 잣대를 들이댈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등 해외에선 기업이 로비스트를 합법적으로 고용해 의회나 정부를 상대로 자신들의 입장을 전달한다. 또 일본에선 주요 장관과 기업 대표가 참석하는 '산업경쟁력회의' 등을 통해 기업 '민원'을 공개적으로 수렴한 뒤 이를 반영한 정책을 내놓는다. 권태신 한국경제연구원장은 "해외에서는 기업의 불편을 정부가 앞다퉈 해결해주겠다고 나서는데, 우리만 기업과 정부의 거리가 더 멀어지는 '반대 방향'으로 나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 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