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년 전인 1999년, 26세 청년 사업가 권돌씨는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련을 겪고 있었다. 그는 휴대전화를 새로 개통할 때 기존 기기에 저장된 전화번호를 옮겨주는 기술을 개발해 사업에 뛰어든 참이었다. 그런데 1년이 채 안 돼 통신사들이 같은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하기 시작했다. 결국 10억원 넘는 빚만 졌고 개인 회생을 신청했다.

당시 24세이던 윤준선씨도 인터넷방송 사업에 손을 댔다가 1년 만에 실패를 맛봤다. 윤씨는 "준비도, 능력도 부족했다"며 "혼자서 어떻게든 해보려 발버둥치다 마음의 상처만 입었다"고 했다.

전자 칠판 소프트웨어 업체인 ISL코리아의 권돌(왼쪽) 대표와 윤준선 부사장이 서울 강남구 사무실에서 본인들이 개발·출시한 ‘빅 노트’ 단말기를 설명하고 있다. 윤 부사장이 손에 들고 있는 단말기를 설치하면 터치스크린 기능이 없는 평범한 TV도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전자 칠판으로 활용할 수 있다.

'1차 벤처붐'의 패자(敗者)였던 이들은 각자 작은 회사에 취업해 절치부심했다. 이어 2013년 벤처기업협회 관계자를 통해 처음 만났다. 권씨가 손바닥만 한 장비로 TV 등을 전자칠판으로 활용할 수 있는 프로젝터 기술을 개발해 다시 사업을 준비했고, 그의 아이디어가 2013년 중소기업청 지원 사업으로 선정된 것이 계기가 됐다.

권씨는 "다시 사업을 하기로 결심하면서 정한 딱 한 가지 철칙이 '혼자선 안 한다'였다"며 "내가 기술 개발에 매진하는 동안 경영 전반과 마케팅을 맡아줄 사람이 필요했는데, 마침 동업자를 소개받은 것"이라고 했다. 회사의 새 투자처를 찾던 윤씨도 "기술과 사람을 보고 같이 일해 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혼자선 실패했던 그들, "둘이라 위기도 이겨내"

생면부지였던 권씨와 윤씨는 한 달간 사업 계획에 관한 얘기를 나눈 뒤 2013년 9월 전자칠판 기능 프로젝터 시스템 '빅노트(Big Note)'를 생산하는 ㈜ISL코리아를 세우고, 각각 대표와 부사장을 맡았다.

권 대표는 "공돌이인 나는 기술, 경영학 전공인 윤 부사장은 기획·마케팅 능력이 탁월했기 때문에 우린 시너지를 낼 것으로 확신했다"고 했다.

시가 38만원 안팎인 빅노트 단말기를 연결하면 터치스크린 기능이 없는 평범한 TV도 전자칠판이 됐다. 가격이 500만~1000만원에 달하는 기존 전자칠판보다 훨씬 경제적이었다. 2014년 1억7000만원이었던 매출은 1년 뒤 10억원으로 급증했다. 벤처 캐피털 투자금 18억원이 모여들었고, 베트남·일본으로 수출 길도 뚫었다.

그러나 작년 초 위기가 왔다. 공격적으로 직원 수를 늘리며 사업을 확장한 것이 화근이었다. 매출액이 정체됐고 빚이 8억원 가까이 쌓였다. 윤 부사장은 극심한 스트레스로 공황 장애를, 권 대표는 심한 탈모 증세를 보였다.

권 대표는 "만약 혼자였다면 18년 전처럼 또 포기했겠지만, 이번엔 둘이어서 서로 의지할 수 있었다"고 했다. 이들은 30명이던 직원을 12명으로 줄이고, 120평짜리 사무실도 30평짜리로 옮기는 등 비용을 줄이고 허리띠를 졸라맸다. 그 결과 작년 말부터 적자 폭이 빠르게 줄기 시작했다. 교육 현장에서도 빅노트가 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올 초 부산의 한 초등학교는 모든 교실에 빅노트를 도입했다. 권 대표는 "작년 매출액이 13억원으로 주춤했지만, 올해 목표는 30억원 이상"이라고 했다.

동업 계약서 없지만… "각자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것이 철칙"

이들은 '동업 계약서'를 별도로 작성하지 않았다. 하지만 '각자 영역은 절대 침범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다. 업무 영역이 겹치면 동업의 시너지가 사라져버린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각각 기술 개발과 회사 경영에 매진하기로 했다.

이제 사석에선 "형 동생" 하며 지낼 법도 한데, 여전히 "대표님", "부사장님" 하며 존칭을 쓴다. 이 또한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기 위해서다. 두 사람은 "처음에 서로 모르던 상태에서 상대방의 능력을 보고 일을 시작했기 때문에 자연스레 서로의 분야를 존중하게 됐다"고 말한다.

권 대표는 "동업자를 찾을 땐 무엇보다 상대방의 경영 철학과 역량을 정확히 판단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정(情)으로, 의리로만 일을 함께 시작했다간 감정 소모가 커지고 결국 사업에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윤 부사장은 "동업의 성패는 서로 다른 전문성이 얼마나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는 것 같다"고 했다.

18년 전 실패를 경험한 공통점이 있는 두 사람은 "창업은 정말 외롭고 힘든 싸움"이라며 "특히 스트레스가 극심한 창업 초기, 마음 맞고 능력 있는 두 사람이 함께 고충을 나눈다면 사업의 성공 가능성을 크게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