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돼지 350만마리를 살처분했던 2010년 구제역 대란이 재발하지 않을까 하는 공포가 커지고 있다. 2011년 구제역 청정국 지위를 포기하고 소·돼지에게 구제역 백신을 맞히기 시작했지만, 2014년 이후 매년 구제역이 발생하면서 우리나라 가축 방역 정책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일고 있다. 사상 처음으로 A형, O형 두 종류의 구제역 바이러스가 동시에 출현하는 등 사태 전개 양상은 과거보다 더 심각해졌다. 지난 16년간 구제역이 8번이나 발생하는 과정에서 살처분 비용 등 3조3000억원의 세금을 투입했는데, 정부가 구축한 방역 시스템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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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 방역 집중하다 소에서 뚫려

2011년 이후 구제역 피해는 주로 돼지에 집중됐다. 살처분 대상 369만두 가운데 353만두(약 96%)가 돼지였다. 이를 이유로 정부는 백신 항체 형성률이 낮고 밀집 사육으로 구제역 전파 속도가 빠른 돼지 농장 위주로 방역 체계를 꾸렸다. 전국의 모든 돼지 농가는 1년에 한 차례 이상 13마리씩 항체 형성률 검사를 받는 반면 소는 사육 농가의 10%(약 9600곳)에서 한 마리씩만 검사를 받는다. 이렇게 뒷전으로 밀려 있던 소에서 구제역이 발생했다.

백신 준비도 부실했다. 우리나라에서 주로 발생하는 구제역이 혈청형 O형 바이러스라는 이유로 A형은 대비하지 않고 있다가 지난 8일 경기 연천 구제역이 A형으로 판명됐다. 인접국 중국에선 A형 바이러스 구제역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는데도 A형 백신을 충분히 확보해놓지 않았던 정부는 영국 백신 제조사에 물량을 확보해 달라고 긴급 요청했다.

◇백신 접종, 농가에 맡기고 사후 관리 소홀

축산 농가들은 지자체에서 공급받거나 축협에서 구한 구제역 백신을 직접 주사기로 투여한다. 정부 역할은 농가에 백신 구입 비용을 지원하고 접종 매뉴얼을 제공하는 것이 전부다. 축산 농가에서 백신을 제대로 접종했는지 체크하는 기능도 엉망이다. 정부는 지난 5일 구제역 발생 직후 "소의 항체 형성률이 96%에 달한다"며 확산 가능성을 낮게 잡았다. 하지만 실제 구제역 발생 농가의 항체 형성률은 20%에도 못 미쳤다.

각 지자체에서 농가 의견을 반영해 정한 표본 등을 주먹구구식으로 조사한 결과가 '숫자 뻥튀기'로 이어진 것이다. 백신 접종 사후 관리가 제대로 안 되다 보니 3년간 백신 구입에만 총 2000억원을 쏟아붓고도 구제역을 차단하지 못하고 있다.

◇기본도 안 지키는 농가

농가도 책임을 피하기 힘들다. 경기도에서 한우 농장을 운영하는 A씨는 "백신 접종을 하면 젖소의 산유량이 줄어든다거나 소의 사산율이 높아진다는 얘기가 있어 백신 접종을 꺼리는 분위기"라고 했다. 또 무허가 농가 비율이 높고 외국인 근로자를 쓰는 곳이 많아 외부로부터의 구제역 바이러스 유입 가능성이 큰데도 통제가 제대로 안 되고 있다. 전체 축산 농가 12만6000곳 가운데 절반가량인 6만곳이 축사 중에 무허가인 곳을 포함하고 있고, 한우의 경우는 무허가 비중이 87%에 달한다.

폐쇄된 가축시장 - 10일 전남 담양의 우(牛)시장 관계자가 방호복과 마스크를 착용한 채 텅 빈 경매장을 둘러보고 있다. 지난 9일 구제역 위기 경보가 최고 단계인‘심각(4단계)’으로 격상되면서 전국 가축 시장이 18일까지 폐쇄됐다.

◇말뿐인 정부 대책들

정부는 구제역이 발생할 때마다 농장 사전 예찰을 강화하고 백신 미접종 농가를 철저히 관리하겠다고 했지만, 지난해 백신 미접종 등에 따른 과태료 건수는 전국에서 69곳(8630만원)에 불과했다. 백신 공급 체계를 구축하고 한국형 백신을 개발해야 한다는 내용도 정부의 '구제역 백서'에 빠짐없이 등장했지만 말뿐이었다.

◇방역 인프라 부족

농림축산식품부 소속 축산 및 방역직 공무원은 20여명에 불과하다. 일본의 방역직 공무원은 100명에 달한다. 우리나라 농림축산검역본부 소속 수의사는 300여명인데, 일본은 공무원 수의사가 820여명에 이른다. 농식품부는 "항체 형성률 전수조사나 백신 접종 감독 등은 인력이나 예산 문제 때문에 현실적으로 힘든 상황"이라고 말한다. 방역 체계 자체가 비효율적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농식품부가 방역 정책을 수립하고, 농림축산검역본부가 검역을 담당하면서 실제 업무 시행은 지자체가 담당하고 있는데, 역할 분담이나 업무 연계가 제대로 안 돼 초동 대응에 실패하는 사례가 반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