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한 대형 마트에서 주부가 채소를 사기 위해 물건을 살피고 있다.

2016년 말부터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이란 경제 용어가 다시 각광받고 있다. 스태그플레이션이란 경기가 침체되어 있는 데 물가는 뛰는 현상을 가리킨다. 유가가 다시 뛰기 시작하고 농산물을 비롯한 원자재 가격이 오르면서 물가가 급등하고 있다는 게 스태그플레이션이란 단어가 다시 나오는 이유다. 한 마디로 경기는 바닥을 기고 있는데 물가만 뛴다는 게 얘기다. 5일 한 민간 경제연구소는 아예 ‘스태그플레이션 가능성이 커지는 한국경제’라는 제목의 보고서까지 내놨다.

경제에서 물가 상승은 사람으로 치면 체온과 같다. 체온이 36.5℃를 넘어가 고열에 시달리게 되면 생명이 위험해지듯이 물가 상승률이 지나치게 높아지면 경제의 안정성을 해친다. 하지만 고열만큼이나 저체온증이 무섭듯이, 지나치게 낮은 물가상승률은 경제가 활력을 잃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는 열은 높은데 신진대사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그런 이상현상(異常現象)이다. 열을 내리자니 신진대사가 더 둔해지고, 신진대사를 활성화하니 열이 더 높아져 세포를 파괴할까 두렵다. 큰 손실을 감내하지 않으면 이를 치료할 수 없다. 스태그플레이션이란 낯선 외국어 속엔 무시무시한 의미가 담겨있는 셈이다.

◆ 유가, 6년前 3분의 2 수준 불과

5일 현대경제연구원은 스태그플레이션 발생 가능성을 명시적으로 언급했다. 지난해 하반기 이후 민간 경제연구소에서 스태그플레이션을 언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올해 1월 들어 소비자물가는 전년 동기 대비 2.0% 올랐다. 물가상승률이 연 2%를 넘은 것은 2012년 10월 이후 처음이다. 유가가 배럴당 50달러 이상으로 오르고 농산물, 금속 등 원자재 가격도 상승했기 때문이다. 달러화에 대한 원화 환율도 지난해 말 달러당 1200원까지 올랐다(원화가치 하락). 여기에 선진국이 경기 회복에 진입하면서 물가 상승률이 높아지고, 임금도 뛰고 있다. “비용 상승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은 내수심리를 위축시켜 소비와 투자 등 실물 부문의 침체를 가속할 수 있다"(현대경제연구원)는 전망까지 나온다.

하지만 상당수 전문가들은 지금의 물가 상승이 과도한지, 정책 대응이 필요한 나쁜 현상인지 의문을 표시한다. 한 대기업 부설 경제연구소 고위 관계자는 “2~3년 전부터 물가상승률이 빠르게 낮아지면서 일본식 장기 디플레이션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아진 상황”이라며 “왜 최근 물가가 뛰었는 지 따져보면 오히려 환영할만한 현상으로 보는 게 맞다”고 말했다.

먼저 물가 상승의 핵심 원인으로 거론되는 원자재 가격 상승은 오히려 일시적인 급락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지적이다. 2010년 1월 가격을 100으로 놓았을 때 2월 4일 현재 두바이유는 68.38, 구리는 79.20, 옥수수는 85.96에 불과하다. 이들 원자재는 2011~2012년 크게 가격이 올랐다가 2016년 초 일제히 바닥을 찍었다. 글로벌 경제가 회복 궤도에 접어들면서 원자재 수요가 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승 폭도 과도하지 않다. 가령 석유의 경우 2016년 3월 골드만삭스는 서부텍사스산원유(WTI)가 올해 배럴당 55~60달러 선에서 횡보할 것으로 전망했다. 올해 WTI는 배럴당 51~54달러 선에서 움직이고 있다.

최근 상승세에도 불구하고 원자재 가격의 절대 수준은 여전히 낮다.

선진국의 임금 상승으로 인해 인플레이션 압력이 강해졌다는 주장도 논리가 허술하다. 무엇보다 선진국에서의 물가 상승은 경기 회복의 결과이지, 방만한 통화 정책으로 인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실업률 하락과 물가 상승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고 언급하는 것도 이때문이다. 일본은 아예 핵심 경제 목표를 ‘디플레 탈출’로 잡았다.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는 “두 번 다시 디플레이션 시대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2%의 물가 상승 목표를 실현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환율 움직임도 물가 상승과는 거리가 멀다. 원화 가치가 떨어져서 수입품 가격을 끌어올려야 하는데, 지난해 11월 도널드 트럼프 신임 미국 대통령 당선 이후 가파르게 하락했던 원화 가치는 다시 상승세다. 2016년 경상수지 흑자 규모는 990억달러로 국내총생산(GDP) 대비 7% 수준이다. GDP 대비 4~5% 수준이던 예전보다 훨씬 커졌다. 미국 트럼프 새 행정부가 원화 가치 절상 압력을 넣지 않더라도, 원화 가치가 하락할 이유가 없는 셈이다.

◆ “일본식 디플레 빠지는 것보다 훨씬 나은 현상”

보통 전년 동기 대비로 표시되는 물가상승률에 비해 전월 대비 소비자 물가지수 등락은 변동폭이 크다.

이 때문에 오히려 지금 국면을 물가 상승률이 이전 수준으로 돌아가는 ‘리플레이션(reflation·re+inflation)’으로 보아야 한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홍춘욱 키움증권 투자전략팀장은 “선진국을 중심으로 경제가 회복 국면에 접어들면서 디플레이션 압력이 약해진 상황”이라며 “그에 따른 전세계적인 물가 상승이 한국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홍 팀장은 “디플레이션보다 리플레이션이 경제적으로 몇 배 더 바람직하다”고 덧붙였다.

지금의 물가 논란은 원자재 가격 등 대외 변수 변화로 인한 ‘충격’이 특정 시점에 집중되기 때문에 나타나는 측면도 강하다. 가격 부침이 심한 원자재 시장 특성에다 글로벌 수요 증가 등 대외 변수 변화가 점진적이기 보다 급작스럽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1월의 경우 전월 대비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연율(年率)로 환산하면 10.8%에 달한다. 하지만 전월 대비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진폭이 컸다. 2010년 1월의 경우 무려 15.2%였다. -4.2%(2012년 11월)를 기록했던 달도 있었을 정도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흔히 체감하는 장바구니 물가의 변화는 숫자로 표시되는 거시 경제 지표보다 훨씬 더 클 수 있다. 그렇다고 이러한 ‘느낌’을 가지고 경제 현상을 판단하는 건 별개의 문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