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송도의 스타트업(초기 벤처기업) 마이지놈박스는 미국 이전을 고민 중이다. 이 회사는 고객의 유전자 정보를 클라우드(가상 저장공간) 빅데이터로 저장해 놓고 이를 활용해 각종 정보를 제공하는 게 사업 모델이다. 빅데이터를 분석해 고객의 유전자 특성에 맞는 음식이나 화장품 정보를 스마트폰으로 제공하고, 유전자 빅데이터를 분석해 특정 유전자를 가진 고객의 발병 가능성을 미리 진단하는 것이다. 유전자 기술에 한국이 강점을 지닌 IT(정보기술)를 잘 접목한 사업이지만 한국에서는 불법이다. 혈당·체질량지수·탈모 등 12개 항목을 제외하고는 민간에서 유전자 정보를 다루지 못하도록 생명윤리법에서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간 업체들의 바이오·헬스 산업 진출 길을 열어줄 '서비스산업특별법', 의사·환자 간 원격진료를 가능케 해줄 '의료법 개정안' 등은 국회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이민섭 대표는 "미국에서는 유전자 정보를 스마트폰으로 활용하는 서비스들이 쏟아지고 있다"며 "미국 투자자들이 본사를 옮기라는 제안도 많이 한다"고 말했다.

미국 도로에서 자율주행차 시험하는 현대차 - 현대차가 개발한 자율주행차가 올 1월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에서 도로를 달리는 모습. 국내에서는 자율주행차가 운행을 하려면 시험요원 두 명 이상이 꼭 타야 하지만, 네바다주 등 미국 각 주에서는 관련 규제가 없다.

바이오·자율주행차·드론·핀테크(금융기술)·인공지능(AI) 등 4차 산업혁명이 눈앞에 다가왔지만 우리나라는 여전히 낡은 법률과 제도 규제가 기술 발전의 뒷덜미를 잡고 있다.

규제에 가로막혀 꼼짝 못하는 4차 혁명

헬스케어 스타트업인 네오펙트의 '스마트 재활 글러브'는 지난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IT(정보기술) 전시회인 'CES 2017'에서 가장 멋진 제품 14종 중 하나로 선정됐다. 이 제품은 뇌졸중 등으로 손이 마비된 환자들이 끼면 센서가 손의 움직임을 측정해 의사에게 생체정보를 보내고 진단과 처방을 내릴 수 있게 한다. 하지만 이 회사는 국내보다는 해외 판로 개척에 주력하고 있다. 원격진료가 허용되지 않은 한국에서는 제대로 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회사 관계자는 "미국 재향군인회에서는 퇴역 군인들에게 제품 구매 비용까지 지원해 주는데 한국에서는 일반 소비자 대상 판매가 어렵다"고 말했다. KT 같은 대기업들도 모바일 소변·혈액 검사기와 모바일 초음파 기기를 이용한 원격진료 서비스를 르완다 등 다른 나라에서 먼저 시작했다.

국내판매 어려운 ‘스마트 재활 글러브’ - 네오펙트의 ‘스마트 재활 글러브’를 착용한 환자가 모니터를 보며 재활 훈련을 하고 있다. 글러브에 달린 센서는 화면 속 와인을 따르는 손의 움직임을 감지해 정보를 저장, 전달한다. 이 제품은 원격진료가 허용되지 않는 국내에서 판로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국내 드론 개발 업체 직원들은 강원 영월과 전남 나주 등으로 출장을 자주 간다. 개발업체가 몰린 수도권이나 대전 대덕연구단지 인근 상공은 비행금지 구역이 많아 '드론 안전성 검증 시범 사업 지역'으로 지정된 먼 지역을 찾아가 '테스트 비행'을 하기 때문이다. 이뿐이 아니다. 드론 무게 13㎏이 넘으면 항공청에 신고해야 하고, 25㎏이 넘으면 교통안전공단 안전 인증을 받아야 한다. 중국 기업들이 무게 200㎏짜리 '드론 택시'를 올해 IT 전시회 CES에 들고 나온 것과 대조적이다. 드론 개발업체 관계자는 "중국에서는 드론 비행금지 구역만 설정돼 있고 다른 규제는 전혀 없다"고 말했다. 자율주행차의 경우도 '임시운행을 할 때 운전자를 포함해 2인 이상 탑승해야 한다'는 요건 때문에 사람이 탑승하지 않은 무인차 개발에 성공해도 최종 시험운행을 하려면 미국까지 가야 할지 모른다는 말이 나온다. 미국 애리조나주는 이미 운전자 없는 시험 운행을 허용하고 있다. 인터넷은행 사업도 사업자를 선정한 지 1년이 넘었지만 금융과 산업자본을 분리해야 한다는 금산분리 규정에 막혀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고 있다. 지난 2일 국회에서 열린 '인터넷전문은행특례법' 토론회에서도 "인터넷 은행 소유 규제에 예외를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만 난무했다.

"규정이 없으면 일단 불법… 네거티브 방식으로 바꿔라"

법률에 관련 규정이 없으면 일단 불법으로 간주되는 것도 새로운 혁신을 더디게 한다. 3D프린터 스타트업 삼디몰은 소비자들에게 3D 프린터 부품을 판매하고 소비자들이 직접 제품을 만들도록 하는 'DIY(do it yourself)' 방식으로 사업을 하지만 작년 8월 전기용품 안전관리법 위반으로 고발당했다. 3D프린터 완제품에 대해서만 안전성 신고 규정이 있고 DIY 모델에 대해서는 관련 규정이 없어 빚어진 일이다. 이병태 KAIST 경영대 교수는 "법에 규정이 없으면 모든 게 불법인 우리나라에서는 우버(차량 공유) 같은 혁신 서비스가 나올 수 없다"면서 "금지 항목을 명확히 하고 나머지는 모두 허용하는 네거티브 규제가 빨리 도입돼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