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소주 한 병에 1900원이래!”

지난 18일 서울 마포구 홍익대 인근 건물 2층. ‘편의점 포차’ 간판이 붙은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자 30평(99.2㎡) 남짓한 공간 한 쪽에 차려진 식료품 판매대에서 20대 젊은이들이 신난 듯 소리를 지르며 소주와 라면, 냉동 핫도그 등을 고르고 있었다. 소주 4병(7600원)과 라면(2500원), 계란(500원), 소시지(3700원), 냉동만두(2000원), 과자(2000원) 등 이것저것 다 담아 계산해도 2만원을 넘지 않았다. 계산을 마친 이들은 간이 테이블에 앉아 안주를 펼쳐놓고 술잔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영하 7~8도의 추운 날이었지만 포차 안은 3~4명씩 둘러앉은 테이블마다 청춘들의 입김과 취기로 습식 사우나에 온 듯했다.

지난해 문을 연 이 ‘편의점 포차’는 말 그대로 소주·맥주에 편의점에서 판매하는 냉동 및 냉장 식품, 과자, 라면 등을 안주로 파는 ‘수퍼형 주점’이다.

최근 1~2년 사이 기존 음식점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술과 안주를 내놓는 수퍼형 주점이 대학가와 각 지방 번화가를 중심으로 늘고 있다. 수퍼형 주점은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 급속하게 늘었다 사라졌던 ‘편의방(편의점과 주점을 합친 것)’과 닮은꼴이다. 주로 지갑이 얇은 청년층이 값싸고 편안한 술자리를 즐기기 위해 찾는다.

한상린 한양대 경영학과 교수는 “수퍼형 주점은 불황 속 주머니 사정이 힘든 고객층을 재미있고 신선한 방식으로 공략하기 위해 만든 아이디어”라며 “값싼 술과 안주를 찾는 고객과 저렴한 비용으로 창업하려는 창업자의 이해관계가 맞물리면서 수퍼형 주점이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홍대 인근에 위치한 '편의점포차'. 문을 열고 들어서면 가게 내부 한 켠에 편의점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공간이 마련돼있다. 주류부터 냉동식품, 과자, 라면, 아이스크림이 판매되고 있으며, 카운터 한 켠에 떡볶이와 어묵탕 코너도 마련돼있다.
기자가 직접 장바구니에 술과 각종 주전부리를 담아보았다(왼쪽). 2만원도 채 들지않은 상차림으로 제법 든든하게 저녁을 해결할 수 있었다.

◇‘1900원’ 소주, ‘2500원’ 생맥주 내세운 편의점 포차…지갑 얇은 20대 초중반이 주 고객층

편의점 포차의 강점은 무엇보다 저렴한 가격이다. 소주 가격은 1900원으로 편의점 가격(1200~1300원)보다는 좀 비싸지만 음식점(4000~6000원)과 비교하면 반값도 안된다.

안주 종류는 일반 주점보다는 아무래도 부실하지만 역시 가격대가 무기다. 편의점에서 흔히 파는 것들로 대개 500원에서 5000원 수준이다. 소주용 안주로 가장 인기 있는 것은 즉석 라면. 포차 안에 설치된 조리 기계에서 직접 끓여먹을 수 있다. 즉석 떡볶이는 한 접시에 2500원, 오뎅은 2개 1000원. 역시 인기 메뉴인 만두는 물만두와 매운만두, 찐만두 등 종류별로 2000~5000원대 가격에 살 수 있다.

이곳에서 4명이 술과 안주를 시킬 경우 2만원대면 제법 그럴싸한 술상을 차릴 수 있다. 한 사람당 5000원 꼴이다. 실제 이 날도 4명이 소주 4병(7600원)과 오뎅 4개(2000원), 라면 2인분(5000원), 찐만두(3300원), 떡볶이1인분(2500원), 닭강정 1봉지(3500원)을 주문하고 2만3000원에 술잔을 기울였다. 일반 주점이라면 소주 4병에 안주 2~3개를 주문할 경우 적게 잡아도 4만~5만원이 든다는 점을 감안하면 훨씬 저렴한 셈이다.

맥줏값도 500cc 생맥주 한 잔이 2500원으로 일반 호프집(3000~5000원)의 50~80% 수준이다. 3~4년 전부터 생맥주와 감자튀김을 주력 상품으로 젊은 층을 공략해 인기를 끈 ‘봉구비어’, ‘춘자비어’ 같은 맥주 체인과 비교해도 500cc 맥줏값이 500~1500원 싸다.

이 때문에 편의점 포차를 찾은 손님은 20대가 주류다. 편의점 포차 대표 김규연(30)씨는 “대학가인 데다 주변 술집보다 가격이 저렴해 주로 20대 초중반 고객들이 많이 온다”고 말했다.

포차를 찾은 박소원(25)씨는 “가격이 싸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며 “확실히 주변 대학가 술집보다 안주나 술값이 저렴해서 다음에도 또 올 생각”라고 말했다. 또 다른 대학생(24)은 “학생이라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지만 그래도 놀 땐 놀아야 하지 않겠나”라며 “안주가 맛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싸서 좋다”고 말했다.

20대 초중반 젊은이들이 포차 안에 마련된 간이 테이블에 앉아 복작복작 술을 마시고 있었다. 자리가 부족해 줄을 서서 대기하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점점 늘어나는 ‘수퍼형 주점’…불황 시대 新풍속

기존 음식점보다 싼 술값에 수퍼에서 구할 수 있는 주전부리 등을 안주로 내놓는 ‘수퍼형 주점’ 체인도 전국적으로 속속 문을 열고 있다. ‘종로맥가’와 ‘더가게맥주’ 등이 그 예다.

종로맥가는 대전에서 은행원을 하던 안주환씨가 퇴사 후 창업한 업체로, 대전과 충청권에 체인점이 분포돼 있다. 최근 1년 사이 체인점이 21개나 늘어 총 26개의 체인점이 영업 중이다. 더가게맥주는 현재 수도권을 중심으로 총 8개 체인점이 들어섰다.

안씨는 “수퍼형 주점은 가격이 기존 술집보다 저렴한 데다 창업자 입장에서는 주방 운영을 하지 않고 재고 관리만 하면 되기 때문에 인건비를 절약할 수 있다”며 “손님과 점주 모두에게 좋은 형태”라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수퍼형 주점이 늘어나는 현상이 과거 IMF 외환위기 직후 경기가 불황일 때 편의점과 주점을 합친 ‘24시 편의방’ 등 저렴한 콘셉트의 주점이 우후죽순 늘어난 상황과 비슷하다고 지적한다.

편의점 포차 대표 김씨는 “부담없는 가격으로 술을 마실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보니 결론은 편의점에서 사서 집에서 마시는 것밖에 떠오르지 않았다”라고 창업 계기를 설명했다.

오세조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는 “불황일수록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를 따지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며 “수퍼형 주점이 잘되는 것도 적은 돈으로 더 큰 만족을 얻기 위한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