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력한 보호무역주의를 앞세운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공식 출범하면서 재계에 비상이 걸렸다. 트럼프의 발언에 글로벌 자동차 기업들이 항복 선언을 했으며, 현대자동차도 5년간 미국에 31억달러(3조6000억원)를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한국 기업들은 트럼프 눈에 들어야 4년을 편하게 지낼 수 있지만 별다른 인연이 없는 데다 8년 만에 ‘민주당’에서 ‘공화당’으로 정권 교체가 이뤄진 것도 부담스럽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정권 교체기 때마다 가교 역할을 톡톡히 해온 류진 풍산그룹 회장이 주목받고 있다.

류진 회장은 부친인 고 류찬우 회장 시절부터 탄약 제조 등 방위사업을 해온 인연으로 미국 정치권 고위 인사들과 폭넓게 교류했다. 류 회장은 조지 W 부시 행정부와 오바마 행정부에서도 한미간 메신저 역할에 나섰다. 미국 공화당과 민주당을 넘나드는 류 회장의 탄탄한 인맥이 이번에도 빛을 발할지 관심이 모아진다.

류진 풍산그룹 회장(오른쪽)이 2016년 9월 한미친선의 밤 행사에서 한승주 당시 한미협회장으로부터 ‘한미우호상’을 받고 있다.

◆ 류진 회장, 미 공화당 인맥 탄탄…프레지던츠컵에 이재용 부회장 초청

풍산은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1968년 설립돼 50년 역사를 자랑하는 기업이다. 동과 동합금 제품을 생산하고 있으며, 군용·스포츠 탄약 등을 제조·판매한다. 지난해 1~3분기 매출 2조208억원, 영업이익 1577억원을 기록했다.

풍산을 이끄는 류진 회장은 임진왜란 때 왜군을 물리치는데 큰 역할을 했던 서애 류성룡 선생의 13대손으로 ‘2세 경영인’이다. 류 회장은 일본에서 고등학교를 나왔으며,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덕분에 영어와 일어에 능통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다트머스대에서 경영학석사(MBA) 학위를 받았다.

류 회장은 재계에서 왕성한 대외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전국경제인연합회와 무역협회, 방위산업진흥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한미 재계회의에도 참석하고 있으며 지난해 9월에는 한미우호상을 받았다.

사람들은 흔히 류진 회장을 한 손엔 동전을, 다른 한 손엔 총알을 들고 해외를 누비는 글로벌 최고경영자(CEO)라고 일컫는다. 해외 정부와 협조가 필요한 사업을 하고 있기에 각국 정⋅재계 인사는 물론 군 참모들과도 친분이 두텁다.

특히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 콜린 파월 전 국무장관과 같은 미국 공화당 정치 거물과 끈끈한 인연을 맺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류 회장은 파월 전 장관의 자서전 ‘나의 미국여행(My American Journey)’을 번역했으며, 2015년 10월 프레지던츠컵 대회조직위원장을 맡아 이명박 전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을 골프 라운딩에 초청해 주목받았다.

류 회장은 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과의 라운딩에 초청한 것은 물론 콜린 파월 전 국무장관과의 만남도 주선한 것으로 전해진다. 2015년 2월 이재용 부회장이 류진 회장의 모친인 고 배준영 여사의 상가에 조문한 것도 이런 친분이 작용한 것으로 재계는 보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한국 기업인 중 류진 회장 만큼 미국 정치인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며 “류 회장이 노무현 정권 초기 대미 관계 개선에 적극 나섰으며, 트럼프를 떠받드는 공화당 세력과 친분이 두텁기에 이번에도 재계의 기대가 크다”고 말했다.

류진 풍산그룹 회장(오른쪽 첫번째)이 콜린 파월 전 국무장관(왼쪽 두번째), 버치 오터 미국 아이다호 주지사와 함께 한 모습.

◆ 풍산, 미국 공장 역사 30년…동 가격 상승·총기규제 완화 수혜

류진 회장의 화려한 인맥 외에 풍산이 트럼프 시대에 주목받는 것은 미국에 동과 동합금 제품 제조 공장을 두고 있는데다 스포츠탄약 같은 방산 제품도 수출하기 때문이다.

풍산은 1989년 미국 아이오와주에 자회사 PMX인더스트리를 설립했다. 주화 제조와 산업용 동판 사업을 하는 PMX는 설립 초기부터 실적 부진을 겪어오다가 2015년 유상증자를 실시한 뒤 본사 차원에서 더이상 지원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안정을 찾고 있다. 미국 경기 회복과 원료 가격 상승 등으로 지난해에는 소폭의 흑자를 낸 것으로 알려졌다.

풍산은 과거 미국 정부가 1달러 주화 발행을 논의할 당시 홍보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으며, 그 결과 대량의 주화 제조 물량을 확보할 수 있었다.

트럼프 당선 이후 국제 동 가격이 상승하면서 풍산의 실적 개선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 미국 내 총기규제 완화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수혜를 볼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미국 인프라 투자에 대한 기대감으로 지난해 4분기 동 가격은 전 분기 대비 4.6% 올랐다. 전미총기협회는 미국 대선 운동 당시 트럼프를 지지했으며, 트럼프 대통령은 총기소유를 옹호한다.

백재승 삼성증권 애널리스트는 “올해 풍산의 실적을 결정짓는 주요 요인은 구리 가격의 방향성과 방산 수출 증가세 지속 여부”라며 “2014년과 2015년에 저조했던 미국 내 스포츠탄 수요가 회복되고 있으며, 우호적인 구리가격 흐름이 자회사 실적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