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통신정책연구원, 지난해 12월부터 전 직원 임금체납

2015년 서울 중구 장교동 서울고용센터 앞에 체납 임금 청산 집중 계도 기간을 알리는 안내판이 설치돼있다. 임금 체납은 정부가 가장 문제 삼는 노동 이슈 가운데 하나다.

40대 초반의 연구원 A씨는 1주일 앞으로 다가온 설 명절을 앞두고 심란하다. 몇 해 전 미국 명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에 입사해 열심히 일해왔다고 생각했는데, 지난해 12월 급여를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설 직전에 나오는 1월 급여도 나올 거라는 이야기만 돌 뿐, 공식 발표가 없다. 체납된 지난달 급여는 어떻게 보전해주겠다는 것인지도 감감무소식이다. 게다가 예산과 관련된 권한을 쥔 기획재정부가 구조조정 등 자구안을 마련하란 입장이어서 연구소 분위기가 어떻게 바뀔지 불확실하다. “멀쩡한 연구소에서 임금체납이라니 황당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며 “성실하게 연구를 수행해왔다고 생각하는 데, 이렇게 자괴감을 느낀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KISDI가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으로는 처음으로 대규모 임금체납 사태로 내홍을 겪고 있다. KISDI는 옛 정보통신부(현 미래창조과학부) 시절부터 IT(정보기술) 정책 입안에 핵심 역할을 맡고있는 국책 연구소다. 그런데 지난해 12월 21일 급여지급일에 “이번달 급여를 지급하지 못하게 됐다”는 내용의 휴대폰 문자메시지를 직원들에게 발송하면서 임금체납 사태가 발생하게 됐다. KISDI는 연봉의 30%를 1년에 네 차례 성과급 명목으로 지급하는 데, 월 정기급여 뿐만 아니라 성과급도 지급되지 않았다. 이번달도 급여지급일(20일) 전날까지 사측은 임금 지급 여부에 대해서 공식 발표를 내놓지 않은 상태다.

사태가 발생하게 된 원인은 KISDI가 쌓아둔 652억원 규모의 ‘정보통신연구적립금(연구적립금)’의 운용 수익이 확 쪼그라들었기 때문이다. 1980~90년대 한국전기통신공사(KT)와 한국이동통신(SK텔레콤)이 KISDI에 출연한 470억원을 종잣돈으로 기금을 굴려 쌓은 돈이었다. 2015년 감사원은 KISDI가 이 연구적립금을 이사회 승인 없이 규정 외 별도 예산으로 편성해 써왔다고 지적했다. 현행 규정에 따르면 KISDI의 연구적립금 같이 쓰이지 않는 돈이 있으면 정규 예산 편성에 포함되어야한다. 이후 기획재정부는 2016년 정부 출연 예산을 끊고, 대신 KISDI가 연구적립금을 굴려 4.5%의 수익을 거두는 것을 전제로 예산을 편성하게 했다. 하지만 실제 운용수익률은 1%대에 불과했다. 결국 돈이 다 떨어진 KISDI가 12월 급여일에 직원들을 대상으로 ‘모라토리엄’을 선언하게 된 것이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는 대표적인 대형 정부출연연구기관 가운데 하나다.

출연연은 일부 운영비를 정부 예산으로 받지만, 전체 예산의 30% 이상은 연구용역을 수행해 얻은 자체 수익으로 충당한다. KISDI는 지난해 당초 목표인 75억원을 웃도는 79억원의 연구용역 수익을 거뒀다. 김사혁 KISDI 노조(전국공공연구노동조합 정보통신정책연구원지부) 위원장은 “기업으로 치면 영업실적은 흑자인데, 경영진이 과실을 범해 임금을 주지 않게 된 것”이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적립금이 600억원이 넘는 데 이걸 그대로 두고 돈이 없는 것처럼 연구소가 구는 걸 이해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현재 KISDI와 예산 결정권을 쥔 기재부는 정원축소, 임금동결 등 구조조정 계획을 준비하고 있다. 138명인 정규직 정원을 10명 가량 줄이는 게 구조조정안의 골자다. 기재부 관계자는 “고용된 인원이 정원보다 약간 작아 무리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KISDI 노조 측은 “실제 해고 당할 수 밖에 없는 인원이 발생할 것”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당장 1월 급여는 지난해 편성된 2017년 예산으로 나가지만, 올해 급여를 어떻게 지급할 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출연연 관계자들에 따르면 연구용역 수주 실적이 낮은 출연연이 연말 일부 임금체불 사태를 겪는 일은 몇 년에 한 번 정도 발생한다. 2014년 12월 직원 1인당 70만~80만원 정도 급여가 적게 지급된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사례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STEPI가 이듬해 미지급 급여를 바로 지급하는 등 적어도 급여 지급에서 큰 문제가 발생한 적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