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의 모바일 칩 설계업체인 퀄컴이 한국에 이어 자국인 미국에서도 궁지에 몰렸다. 미국의 공정거래위원회인 연방무역위원회(FTC)로부터도 휴대폰의 핵심 반도체인 모뎀칩(베이스밴드)의 독점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부당한 방식으로 경쟁 반도체 회사의 진입을 막은 것이 확인돼 피소를 당한 것이다.

18일 외신에 따르면 미국 FTC는 퀄컴이 모뎀칩 독점을 유지하기 위해 고객사, 경쟁사 등에 부당한 압력을 가했다며 캘리포니아 연방법원에 퀄컴을 고소했다. FTC는 소장에서 퀄컴이 이동통신을 가능하게 해주는 베이스밴드 프로세서의 지배적 공급자 지위를 이용해 휴대전화 제조업체를 압박하고 경쟁 반도체 업체들을 몰아냈다고 주장했다.

앞서 한국 공정거래위원회도 사실상 같은 이유로 퀄컴에 1조원대의 과징금 명령을 내렸다. 공정위 고위 관계자는 "과징금 부과 결정을 내리기 이전에 미국 FTC에 관련 사항에 대해 문의를 했었고 비슷한 결정이 내려질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퀄컴은 현재 유럽, 대만에서도 비슷한 혐의로 경쟁 당국의 조사를 받고 있다.

미국 샌디에이고 퀄컴 본사 전경.

◆퀄컴에 칼 빼든 한국, 미국 경쟁당국..."특허로 경쟁사 진입 막아"

FTC가 퀄컴에 제기한 문제의 핵심은 한국 공정위가 제기한 것과 비슷하다. 인텔, 미디어텍 등 모뎀칩 사업을 하는 경쟁 반도체 회사들에는 칩을 판매하지 않고 휴대폰 제조업체에만 모뎀칩을 라이선스(사용권한)을 준 것이 문제였다. 또 6년간 최대 고객사인 애플에만 유리한 로열티 비율을 적용해 '표준특허를 공정하게 제공해야 한다'는 ‘프랜드(FRAND)’ 확약을 어겼다.

퀄컴은 스마트폰 통신 기능의 핵심인 모뎀칩 분야에서 표준필수특허(SEP)를 보유하고 있다. 한 기업의 특허가 표준필수특허로 채택되면, 다른 기업들은 회피 설계가 불가능해 해당 기술을 이용해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 이 때문에 표준필수특허의 경우, 특허권자는 다른 기업과 특허 협상을 할 때 공정하고 합리적이며 비차별적으로(fair, reasonable, and non-discriminatory) 해야 한다. 이를 '프랜드(FRAND) 원칙'이라고 한다.

FTC 관계자는 "퀄컴이 불공정한 방식으로 사업을 하면서 경쟁 반도체 기업들이 피해를 입고 시장에서의 혁신을 저해했다"며 "이는 결과적으로 소비자들이 사는 휴대폰과 태블릿 가격이 상승하는 효과로 이어졌다"고 주장했다. 이어 퀄컴은 "불공정 행위를 금하고 환경을 공정하게 되돌려 놔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달 공정위도 퀄컴이 경쟁 모뎀칩 제조사인 삼성전자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칩셋 제조, 판매에 필수적인 표준필수특허(SEP)에 대한 라이선스 제공을 거절하거나 제한했다며 과징금을 부과했다.

지난달 공정거래위원회가 퀄컴에 1조원대의 과징금을 부과하며 근거로 제시한 퀄컴의 모뎀칩 사업방식 구조.

◆20년 무패 퀄컴에 철퇴 내릴수 있을까

다만 FTC가 퀄컴을 법원에 정식으로 기소할 수 있을지 여부는 불투명하다. 이번 제소를 주도한 에디스 라미레즈 FTC 위원장이 다음 달 10일 임기가 끝난다. 새 위원장이 선출되기 전까지 직무대행을 맡을 예정인 마우린 올하우젠 위원은 이번 FTC 위원회에서 퀄컴 기소에 반대표를 던진 것으로 알려졌다.

도널드 트럼프 정권과 함께 신임 FTC 위원장으로 거론되는 인물은 공화당의 숀 레예스 유타주 의원이다. 외신은 FTC 위원의 과반수 이상을 공화당이 점령할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이는 FTC가 좀 더 보수적이고 자국 기업 보호적인 공화당의 정책 기조에 따라 운영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으로 이어지고 있다. 현 위원장의 퀄컴 제소가 예정대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의미이다.

공정위는 지난 2009년에도 퀄컴의 시장 지배적 지위 남용을 이유로 2732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한 바 있지만 이 소송은 아직도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이번 소송 역시 1~2년 내에 쉽게 결론을 내기 어렵다는 것이 법조계의 지배적인 해석이다.

국내 대형 로펌의 한 관계자는 "업계에서는 퀄컴이 보유한 전문 인력의 절반이 사실상 법조인이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막강한 법무조직을 20여년간 운영해 왔고 실제 대부분의 소송에서 면죄부를 받아왔다"며 "다만 지금 상황처럼 미국, 한국, 대만 등 동시 다발적으로 피소 당한 사례는 흔치 않은 만큼 퀄컴에 대한 새로운 판례를 만들 수 있을 지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반도체 업계의 한 관계자는 "퀄컴뿐만 아니라 구글, 인텔, 마이크로스프트(MS) 등도 FTC로부터 수차례 피소 당했지만 표준특허를 남용했다는 이유로 사업 모델을 변경한 사례는 아직까지 없었다"며 "특히, 이번에 문제가 된 FRAND 원칙 위배가 반독점법 근거로 활용되려면, 소비자 피해에 대한 구체적 증거가 더 필요할 것"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