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그룹이 올해부터 5년간 미국에 31억달러(약 3조6000억원) 규모의 투자를 하겠다고 17일 밝혔다. "미국에서 물건을 팔고 싶으면 미국에서 고용해 생산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불이익을 주겠다"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압박에 현대차도 미국 추가 투자 계획을 밝힌 것이다. 트럼프는 이미 포드·GM 같은 미국 자동차 업체는 물론 외국 기업인 도요타 등을 상대로도 '미국 내에 투자하라'는 압력을 행사해 투자 약속을 속속 받아내고 있다.

정진행 현대차 사장은 이날 외신기자들과 만나 "친환경·자율주행차 등 미래 신기술 개발과 관련한 연구·개발(R&D) 투자 확대와 기존 생산 시설에서 신차종 생산, 환경 개선 투자 등을 위해 2021년까지 미국에 31억달러를 투자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이 같은 투자 규모는 지난 5년간 미국 투자액(21억달러)보다 50% 이상 늘어난 것이다. 현대차그룹의 연간 국내 총투자액은 12조5000억원 규모이다.

현대차그룹은 또 "미국 산업 수요 추이 등을 감안해 신공장 건설도 검토할 수 있다"는 입장도 발표했다. 현대차그룹은 미국에서 앨라배마주(현대차)와 조지아주(기아차)에 연간 71만대 생산 규모의 공장을 가동하고 있다.

정 사장은 이번 결정에 대해 "정상적인 경영활동의 일환으로 예정돼 있던 투자"라며 "트럼프의 발언과는 무관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재계에서는 현대차그룹의 이번 투자 계획 발표가 오는 20일(현지 시각) 취임하는 트럼프의 보호무역주의를 염두에 둔 조치로 해석하고 있다. 도요다 아키오 도요타자동차 사장이 지난 9일 "앞으로 5년간 미국에 100억달러(약 12조원)를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할 때에도 도요타는 "원래 계획됐던 투자"라고 강조한 바 있다.

하지만 외신들은 "트럼프가 트위터에 '도요타는 미국에 공장을 짓거나 아니면 막대한 국경세(border tax)를 내야 한다'는 글을 올린 지 나흘 만에 도요타가 트럼프에게 백기를 들었다"고 분석했다.

현대기아차 입장에서 미국은 중국에 이은 두 번째 큰 시장이다. 현대기아차의 지난해 미국 판매량(142만2603대)은 전 세계 판매량의 17%를 차지한다. 특히 기아차가 1조원을 들여 지난해 9월 완공한 멕시코 공장(연산 40만대)은 현대차그룹의 '아킬레스건'이다. 트럼프가 멕시코에서 생산한 제품에 대해 35% 징벌적 관세를 매기겠다고 한 선거 공약이 현실화할 경우 기아차 멕시코 공장은 날벼락을 맞는다.

트럼프는 기업들에 노골적으로 "미국에서 물건을 만들고 미국 사람을 고용하라"고 압박을 가하고 있다. 이날 미국 최대 자동차업체 GM이 미국 공장에 최소한 10억달러(약 1조2000억원)를 투자한다고 외신들이 보도했다. 멕시코 공장 설립 계획을 취소하고 미시간주에 7억달러를 들여 공장을 짓겠다고 발표한 포드, 미국 공장에 10억달러 투자와 2000명 추가 고용을 밝힌 피아트크라이슬러에 이어 GM까지 투자 계획을 밝힘으로써 미국 3대 자동차 회사 모두 트럼프의 압박에 두 손을 들었다.

우리 기업들도 긴장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LG전자는 미국에 생산 공장을 확충하거나 신설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삼성전자의 전 세계 매출 가운데 25%(약 50조원)가 미국에서 나오며, 주력 품목인 TV는 멕시코에서 전량 생산한다. LG전자도 전체 매출에서 북미 지역이 차지하는 비중이 30%에 육박하며 대부분 멕시코 공장에서 공급하고 있다. 허윤 서강대 국제대학원장은 "우리 정부와 기업들이 오바마 정부와 완전히 다른 통상 질서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