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점은 ‘요새 유행하는 게 뭐가 있나’ 둘러보려고 오죠. 사는 건 아울렛이나 인터넷에서 해요. 백날 세일해봤자 아울렛보다 비싸니까.”

금요일인 지난 6일 오후 현대백화점 압구정 본점에서 만난 양모(55·여)씨의 양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았다. 마음에 드는 물건을 못 찾았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물건을 사러 온 건 아니고, 근처에 볼일이 있어 들른 김에 요즘 뭐가 유행하는지 구경하려고 왔다”면서 “요즘은 물가가 너무 오르고 지갑은 얇아져 어지간하면 백화점에선 사지 않는다”고 말했다.

유통업계 최대 대목인 지난 연말 신통치 않은 성적을 받은 백화점들이 새해 첫 영업일부터 세일 행사에 돌입했다. 통상 백화점은 신년 첫 주말쯤 세일 행사를 시작하지만 올해는 월요일인 2일부터 일제히 세일에 들어갔다. 이는 정유년 시작과 동시에 소비 심리의 불씨를 살리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그러나 장기 불황에 따른 소비 심리 부진은 백화점 세일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현대백화점 본점 내부.

이날 백화점에서 만난 소비자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불황기 소비자들의 지갑은 백화점에서 쉽게 열리지 않았다. 잦은 할인 행사에 더이상 구미가 당기지 않을 뿐더러, 정가와 비교했을 때도 가격 차이가 크게 나지 않는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구매는 인터넷 쇼핑몰이나 아울렛에서 하고 백화점은 ‘참고’만 한다는 것이다.

◆ “세일해도 비싸”…카페·식품관·면세점만 북적북적

주요 백화점들의 정기 세일이 시작된 첫 금요일인 지난 6일 오후 압구정동에 있는 현대백화점 본점은 ‘세일을 하는게 맞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람이 없었다. 지하철역과 연결된 입구에도 찬바람을 피해 수다를 떨고 있는 몇몇 중년 여성들과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학생이 대부분이었다.

여성의류와 잡화, 아동물품을 판매하는 지하 2층은 기자의 구두 소리가 울릴 정도로 적막했다. 지나치는 매장마다 직원들은 물건을 정리하거나 잡담을 하고 있었다. 먼 곳을 바라보다가 어색하게 기자와 눈을 맞추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천장마다 붙어 있는 세일을 알리는 광고를 따라 걷자 에스컬레이터 앞에 마련된 행사장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많아봐야 대여섯명 정도의 주부들만이 바깥쪽에 놓인 가판대 앞을 서성일 뿐, 좀처럼 행사장 안에서는 인기척이 느껴지질 않았다. 행사 표지판을 보고 들렀다가 가격표를 확인하고 발길을 돌리는 손님도 몇 있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 1층으로 올라가자 딴 세상이 펼쳐졌다. 한쪽에는 농수산물 코너에서 장을 보는 사람들이, 다른 한쪽에는 늦은 점심을 먹는 사람들이 테이블마다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여자친구와의 기념일을 챙기기 위해 케이크를 사러 왔다는 김모(22·남)씨는 “백화점에는 보통 맛있는 걸 먹으러 온다”며 “다른 층은 비싸서 구경만 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필요한 것은 주로 어디서 사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인터넷 쇼핑몰에서 사면 훨씬 싸게, 많이 살 수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5층에 위치한 대행사장도 비슷했다. 제품이 진열된 가판대 주변보다 상품권 증정 코너에 몰린 인파가 더 많았다. 반면 행사장 앞 카페는 빈 자리를 찾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서울 중구에 위치한 롯데백화점 본점 1층.

명동과 남대문에 있는 롯데·신세계백화점 본점도 전반적으로 비슷한 분위기였다. 다만 면세점은 중국인 관광객 ‘유커’로 북적였다.

현대백화점과 같은 기간 ‘러블리 명작 세일’을 진행하는 롯데백화점은 지하1층 잡화매장, 지상 1층 화장품 매장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한산했다. 이날 롯데백화점은 총 100만개 규모의 상품을 균일가 및 최대 70%까지 할인하는 ‘럭키 프라이스’ 상품전도 함께 진행했는데 고객은 대부분 유커였다.

6층 골프·아웃도어·남성캐주얼관과 7층 아동·유아관, 8층 생활관도 조용했다. 한 매장 직원은 “흐름이란 게 있어서 장사가 안될 때는 정말 안되고 될 때는 잘 되는데 요즘은 지나가는 사람도 없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반면 면세점이 위치한 9층에서 12층은 발 디딜 틈도 없이 혼잡했다. 사진을 찍으려 잠시 멈춰 선 기자에게 ‘실례한다, 지나가겠다’는 중국어가 쏟아졌다. 각 층마다 배치된 통역사들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고객들 사이를 오가느라 쉴 틈이 없었다. 엘리베이터는 사실상 마비 수준이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여행용 가방, 쇼핑백에 치여 엉겁결에 내리는 손님도 더러 있었다.

롯데백화점 관계자는 “연말부터 계속 소비 심리가 꽁꽁 얼어 붙어 있는데다 최근엔 날씨까지 따뜻해 아직까지 세일의 큰 효과는 보지 못하고 있다”며 “행사기간이 끝나는 22일까지 지켜보면서 좀 더 공격적인 세일을 추진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신세계백화점 본점 2층 여성의류관.

롯데백화점 본점에서 약 400미터 떨어진 남대문의 신세계백화점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한 직원은 제품 하나를 손에 들고 동료에게 ‘이거 언니한테라도 싸게 팔게’라며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 잦은 세일이 오히려 발목 잡아…백화점업계, ‘명품대전’ 열어

백화점의 매출 부진은 수치로 나타나고 있다. 삼성증권에 따르면 백화점의 지난해 11월 매출은 전년 같은 기간과 비교해 2.8% 감소했고, 12월에는 1%가량 늘어났을 것으로 전망된다. 1월 또한 제자리 걸음에 그칠 것으로 추정된다.

백화점 업계는 매출 부진을 타개하기 위해 새해 또 한번의 대규모 세일 행사를 기획했지만 현장에서는 ‘세일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무엇보다 최근 몇년간 소비 부진을 극복하기 위해 너무 자주 세일을 진행했다는 게 현장 직원들의 목소리다. 자주 열다보니 세일을 한다고 해서 고객이 몰리지는 않게 됐다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2000년대 중반만 해도 백화점 세일 기간은 연중 100일 안팎이었으나 최근엔 160~180일까지 늘어났다.

신세계백화점 본점 3층 컨템포러리·슈즈관.

한 백화점 관계자는 “툭하면 세일을 하다보니 고객들이 세일이라고 해서 찾아오는 일이 과거에 비해 줄었다”고 말했다.

백화점 3사는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새해에 다양한 테마를 이용한 세일 행사를 마련했다. 대표적인 것이 명품대전이다. 어차피 백화점 고객은 고가의 명품을 소비하는 경향이 많은 만큼, 명품 대전을 실시해 고가의 제품을 판매하려는 전략이다.

롯데백화점은 11일부터 올해 첫 ‘해외명품대전’을 연다. 노비스, 몽클레어 등 프리미엄 패딩과 명품 시계 브랜드 오메가 등 총 200여개의 브랜드를 20~80% 할인 판매한다. 현대백화점은 13일부터 15일까지 압구정본점에서 130여개의 브랜드 제품을 30~60% 할인하는 ‘해외패션대전’을 진행한다. 20일부터 22일까지는 목동점에서 ‘수입의류 초대전’을 연다.

신세계백화점은 단독 브랜드를 포함한 500여개 브랜드를 최대 70%까지 할인하며, 1년에 두번만 실시하는 국내외 트래디셔널 브랜드 시즌오프 세일과 3만원 상당의 식료품을 1만원에 구매할 수 있는 대박백(Bag) 이벤트를 진행한다. 신세계 관계자는 “고객을 붙들기 위해 여러 테마의 기획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