춥고 메마른 겨울 숲이라도 곳곳에 작은 희망들이 깃들어 있다. 봄날의 화려한 비상을 꿈꾸는 나방의 애벌레들이 그렇다. 양질의 단백질 덩어리인 애벌레는 헐벗은 겨울 숲에서 누구나 탐내는 먹이다. 사방에 천적(天敵)이 득실대는 상황에서 애벌레는 기상천외(奇想天外)한 위장술로 몸을 숨긴다.

무엇보다 천적의 눈에 띄지 않아야 좋다. 곤충들은 겉모습을 주변 환경과 흡사하게 만드는 '의태(擬態)'로 자신을 보호한다. 자벌레가 대표적인 예이다. 앞다리를 움직여 나뭇가지를 꽉 움켜잡은 후에 뒷다리를 끌고 가서 앞다리에 붙이는 동작으로 이동한다. 이처럼 절도 있게 이동하는 모습이 마치 자로 잰 듯하다고 자벌레라는 이름이 붙었다.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경고색으로 천적을 쫓는 꽃술재주나방 애벌레, 낙엽을 몸에 붙여 위장하는 큰무늬박이푸른자나방 애벌레, 다리 두 개로 방울뱀 꼬리처럼 소리를 내 천적을 물리치는 검은띠나뭇결재주나방 애벌레, 뱀눈을 닮은 가짜 눈으로 천적의 기를 꺾는 멧누에나방 애벌레

몸큰가지나방의 애벌레도 자벌레처럼 나무줄기에서 잔가지가 뻗어나간 형태로 몸을 뻗어 붙어있다. 나뭇가지와 색이 비슷하고 모양도 가는 원통형이라 잔가지와 구분이 잘 안 된다. 큰무늬박이푸른자나방 애벌레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주변의 갈색 낙엽을 몸에 붙여 형체를 알아볼 수 없도록 기괴한 모습을 만든다.

반대로 겁 없이 대놓고 자신을 드러내는 애벌레도 있다. 독을 갖고 있으니 조심하라고 눈에 잘 띄는 경계색을 보이는 것이다. 실제로는 독이 없지만 독개구리처럼 무서운 독이 있다고 속이는 것이다.

꽃술재주나방 애벌레는 경계색인 붉은색 몸통에 삐죽삐죽 솟은 검은색 털로 공포심을 유발해 1차 보호를 한다. 그래도 공격하면 좀 더 적극적인 방어 시스템을 작동한다. 마치 기계체조 선수처럼 몸을 뒤로 틀어 불룩하게 만든다. 몸 앞부분도 들어 올려 뱀 같은 자세를 취한다. 몸이 훨씬 크게 보이도록 하고 당장에라도 공격할 것처럼 행동해 자기를 보호하는 것이다.

재주나방 애벌레는 가운데 2쌍의 다리가 기형적으로 길게 자라 있다. 단순히 위협용이 아니라 실제로 앞발 휘두르기로 천적을 쫓아낸다. 검은띠나뭇결재주나방 애벌레는 항문 쪽 다리 2개가 꼬리처럼 변신했다. 자극을 받으면 2개의 꼬리가 방울뱀처럼 '따르르' 소리를 내 천적을 쫓는다.

일부 애벌레들은 최상위 포식자인 뱀의 눈을 모방해 다른 천적의 기를 꺾는다. 포식자들은 보통 먹잇감의 눈을 공격한다. 방향 감각을 마비시키고 편안히 식사하기 위해서이다. 나방 애벌레들은 이 점을 역이용해 뱀의 눈을 닮은 가짜 눈을 머리에 만들었다. 멧누에나방의 애벌레는 위협을 받으면 머리를 몸속으로 집어넣어 앞부분을 부풀어 올린 후에 가짜눈 한 쌍을 천적에게 보여 스스로를 보호한다. 먹이를 낚아채려고 접근했던 포식자는 갑자기 뱀의 무서운 시선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음을 깨닫고 화들짝 놀라 도망간다.

실제로 독을 가진 애벌레도 있다. 독나방과 애벌레들은 복슬복슬한 털이 많아 부드럽고 따뜻하게 보이지만 알고 보면 이름만큼 독하다. 애벌레 털에 살짝 스치기만 해도 피부가 쓰라리고 가려워진다. 심한 알레르기성 접촉 피부염을 발생시키기도 한다. 온몸에 털이 수북한 콩독나방 애벌레가 대표적이다.

겉모습만 보고 피하면 그 안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 영원히 알 수 없다. 애벌레의 기묘한 모양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생존을 위한 자연의 지혜를 배울 수 있다. 이강운 홀로세생태보존연구소장은 20년간 애벌레에 대한 연구를 최근 발간한 '캐터필러Ι'에 집대성했다. 국내에 아직 소개되지 않은 나방 애벌레 153종에 대한 정보가 담겨있다. 과학적 가치가 높을 뿐 아니라 일반인을 위한 교양 도서로 손색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