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구글·마이크로소프트(MS) 등 글로벌 IT 기업에 반도체·디스플레이 등 핵심 부품을 공급하는 삼성·LG·SK 등 국내 대기업 계열사들이 ‘기업의 사회적책임(CSR)’ 제도 재정비에 적극 나서고 있다.

애플·구글 등이 지난해부터 아시아·아프리카 등 해외 소재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업체나 반도체·디스플레이 등 부품 생산 업체에 CSR 기준을 더욱 까다롭게 적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OEM 업체나 부품 생산 업체의 근로자 노동환경이 열악할 경우 납품 단가 인하는 물론 아예 거래가 끊길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어 국내 대기업 계열사들의 CSR 제도 재정비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는 것이다.

2일 전자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005930)는 이미 국내외에 있는 1·2차 주요 협력업체를 대상으로 한 ‘이주 노동자 가이드라인’을 발표했고 LG전자(066570), LG디스플레이(034220), SK하이닉스(000660)등 대기업 주요 계열사들도 CSR 관련 전담 조직을 재정비해 국제적 기준을 연구 중이다.

이와 관련 구글은 최근 국내 대형 디스플레이 업체인 A사에게 협력업체의 노동환경이 열악하다는 이유로 패널 납품 단가를 약 30% 낮추라는 요구를 한 사실도 뒤늦게 알려졌다. 애플 아이폰, 아이패드 시리즈에 주요 부품을 공급하는 국내 전자업체 관계자는 “삼성, LG의 핵심 계열사들은 대부분 애플이나 구글이 제시하는 노동자 환경, CSR 등을 준수하고 있다”면서도 “하지만 삼성, LG에 부품을 공급하는 1·2차 해외 협력업체들에 대한 국제적 기준의 CSR도 요구되고 있어 관련 제도를 정비해야 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국제앰네스티 사무총장 살릴셰티와 회원 및 지지자가 애플스토어 앞에서 아동노동과 관련된 코발트 공급망을 조사할 것을 촉구하는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삼성·애플을 '악마'로 만든 제3세계 노동 착취 문제가 신호탄

구글, 애플이 최근 해외 협력업체들의 노동자 인권 문제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쏟기 시작한 건 지난해 초 세계적인 인권단체 국제앰네스티(AI·국제사면위원회)가 아프리카 서부의 콩고 코발트 광산에서 이뤄진 아동 인권 유린 실태를 담은 보고서를 발표하면서부터다.

이 보고서는 콩고 광산에서 불법적인 아동 노동을 활용해 채취한 코발트(cobalt)를 담은 스마트폰 배터리가 최종 소비자인 삼성전자와 애플에 공급됐다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곧바로 국제적인 논쟁을 유발시켰다. 코발트는 2차전지의 핵심 원료이고 아프리카는 세계 코발트 생산량의 50%가 생산되는 곳이다.

문제는 이같은 노동 인권 문제가 중장기적으로 기업의 치명적인 리스크(Risk)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나이키다. 1990년대 나이키의 아동노동 이슈는 전 세계적인 불매운동을 불러왔고 기업 명성을 추락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 나이키는 뼈를 깎는 공급망 구조조정과 독립적인 제3의 조사 기관 설립 등을 통해 위기를 극복했다.

국내 기업 중에서도 대우인터내셔널이 지난 2012년 CSR 문제로 글로벌 기업인 나이키와 거래가 중단된 사례가 있다. 당시 나이키는 대우인터내셔널이 우즈베키스탄 아동노동 문제에 연루되자 곧바로 거래 중지를 통보했다. 대우인터내셔널은 매출의 40% 비중을 차지하는 대형 고객사를 잃고 핵심 자산을 매각하기도 했다.

◆삼성·SK·LG 주요 계열사들 CSR 선진화 작업 착수

국내 대기업들은 CSR 관련 글로벌 스탠다드를 마련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이는 기업의 중장기적인 리스크를 줄이는 동시에 기업 이미지를 제고하는 데 필수적인 조치라는 판단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국내 최대 전자기업인 삼성전자는 지난해 11월 '삼성전자가 말레이시아 공장에서 네팔 국적의 이주노동자들을 부당하게 착취하고 있다'는 영국 매체 가디언의 보도가 나온 뒤 문제가 커지자 전례 없는 '이주 노동자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삼성전자뿐만 아니라 협력사까지 포괄하는 이 가이드라인에는 어떤 이주노동자도 강제적·강압적 노동, 노예 노동, 인신매매 등의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하는 규정이 담겨 있다. 또 노동자들을 일주일에 60시간 이상 근무시키지 말 것, 만 15세 미만의 이주노동자를 고용하지 말것, 만 18세 미만의 이주노동자에게 철야근무나 초과근무를 시키지 말 것 등의 조항도 포함됐다.

말레이시아 포트클랑의 삼성전자 공장 정문.

삼성의 한 관계자는 “가디언지 보도 이후 삼성전자가 현지 조사에 착수한 결과 문제가 된 노동자들은 삼성전자가 아니라 협력 관계에 있는 한 인력공급업체에서 고용한 것으로 확인됐다”며 “여기에 소속된 이주노동자 대상 조사 중 다수의 위반 사항이 발견됐고, 삼성전자는 문제가 됐던 인력공급업체 한 곳과 계약을 해지했다”고 설명했다. 나머지 공급업체들은 여전히 조사 중이다.

삼성뿐만 아니라 LG전자, LG디스플레이, SK하이닉스 등 애플이나 구글 같은 대형 IT 기업을 핵심 고객사로 두고 있는 업체들도 CSR을 재정비하고 있다. LG전자는 지난해 정기인사를 통해 전무급 조직이던 CSR팀을 부사장급 조직으로 승격시켰고, SK하이닉스 역시 현순엽 기업문화팀장(전무)을 부사장으로 승진시켰다. LG디스플레이도 CSR과 관련한 전담 조직을 재정비해 해외 사례, CSR과 관련한 국제적 기준 등을 연구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전자업계 관계자는 “최근 구글이 CSR을 명분으로 계약 해지를 요구하거나 납품 단가 인하를 요구하는 건 단순한 일회성 사건이 아니라 앞으로 점점 더 자주 생길 것으로 예상되는 사안”이라며 “특히 국내 기업 입장에서는 자사의 노동 환경뿐만 아니라 해외 협력업체의 노동 환경까지 직접 실사를 통해 검증하고 기준을 준수해야 하는 만큼 적지 않은 재원을 투입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