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저 30년 장수비결
'사장님 차'에서 '3040 고급차'로 유연하게 변신
세대마다 최신기술 집약해 경쟁 차종 압도

현대자동차의 준대형 세단 신형 그랜저(IG)가 질주하고 있다. 신형 그랜저는 2016년 11월 2일 사전계약 첫날에만 1만5973대의 계약을 기록했다. 이는 국내 사전계약을 실시했던 차종 중 역대 최대 기록이다. 기존 사전계약 첫날 최대 수치는 2009년 ‘YF쏘나타’가 기록했던 1만827대다.

현대자동차의 신형 그랜저가 한국 자동차 역사상 가장 많은 사전계약 대수를 기록하며 인기를 끌고 있다. 30년 동안 상품성을 높이면서 소비자의 신뢰를 다진 덕분이다.

특히 신형 그랜저의 첫날 사전계약 대수는 국내 준대형 차급의 월평균 판매 대수 1만586대(2016년 1~10월 기준)를 5000대 이상 훌쩍 넘어서는 실적이다. 현대차의 전국 830여개 영업소 한 곳당 하루 만에 19대 이상의 신형 그랜저가 계약됐을 정도로 큰 인기를 누린 셈이다.

신형 그랜저는 2016년 11월 2일부터 11월 21일까지 2만7491대가 계약됐다. 이는 한국 자동차 역사상 가장 많은 사전계약 대수이기도 하다.

사전계약 돌풍을 일으킨 신형 그랜저는 2016년 12월에도 높은 인기를 이어갔다. 신형 그랜저의 12월 판매량은 1만5000대가 넘을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자동차 시장에서 월간 판매량이 1만5000대가 넘은 것은 2014년 4월(쏘나타 1만5392대) 이후 32개월 만이다. 2010년 이후 국내시장에선 쏘나타와 아반떼가 네 번씩 월간 판매 1만5000대 클럽에 가입했다.

SK·LG그룹 등 국내 주요 기업들이 연말 인사를 단행하면서 법인 차량 교체 수요가 늘어난 것이 판매에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진일보한 디자인과 현대스마트센서 등 동급에서는 볼 수 없었던 첨단 안전 편의사양 등을 신형 그랜저의 인기 비결로 꼽고 있다.

신형 그랜저에는 충돌 위험이 있을 때 자동으로 멈추는 ‘자동 긴급제동 시스템(AEB)’을 비롯해 사각지대 충돌 위험을 감지해 안전하게 차로 변경을 돕는 ‘후측방 충돌 회피 지원 시스템(ABSD)’, 운전자의 주행 패턴을 분석해 휴식을 권유하는 ‘부주의 운전경보 시스템(DAA)’ 등이 탑재돼 안전성을 높였다. 디자인을 완전히 바꾸고 상품성을 대폭 강화했지만 가격은 3000만원대로 이전과 비슷하게 책정했다.

신형 그랜저의 인기는 최근 내수시장에서 고전하고 있는 현대차의 돌파구가 될 것으로 보인다. 현대차는 파업과 품질 논란으로 2016년은 11월까지 42만9092대(승용 기준)를 판매했다. 이는 기아차에도 뒤지는 판매량이다. 그랜저 역시 준대형차 시장에서 기아차의 K7에 밀렸다. 하지만 신형 그랜저가 돌풍을 일으키며 준대형 세단 시장 1위 탈환이 확실시되고 있다.

현대차 관계자는 “신형 그랜저 돌풍으로 침체됐던 준대형 시장이 활기를 되찾을 것”이라며 “2017년 국내시장에서 그랜저를 10만대 이상 판매한다는 목표를 세웠다”고 말했다.

인기 비결1. 성공 아이콘 유지하며 젊고 럭셔리한 대중차로 변신
현대차 그랜저는 대표적인 국산차 장수모델이다. 나이로 따지면 코란도, 쏘나타에 이어 3위다. 하지만 그랜저가 갖는 의미는 이들을 넘어선다. 그랜저는 30년간 글로벌 대형 세단과 격전을 벌이며 성장했고, 글로벌 누적 500만대 판매 달성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랜저가 처음 출시된 것은 1986년 7월이다. 1975~80년대 중반 국내 고급차 시장에서 인기를 끈 차는 새한자동차(현 GM)가 독일 오펠의 레코드를 들여와 조립 생산한 ‘로얄 시리즈’였다. 현대차가 이에 맞서기 위해 내놓은 차가 바로 1세대 그랜저였다.

1세대 그랜저는 현대차가 일본 자동차 기업 미쓰비시와 공동 개발한 모델이다. 현대차가 디자인을, 미쓰비시가 설계를 맡았다. ‘웅장·장엄·위대하다’는 뜻을 가진 그랜저는 당시 ‘사장님의 차’ ‘성공한 남자의 차’로 자리매김했다. 당시 신문광고 문구는 ‘품위도 정상, 사업도 정상’이었다. 1세대 그랜저는 직선이 강조된 디자인 때문에 ‘각(角) 그랜저’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하지만 이 딱딱한 디자인이 오히려 우리나라 고소득 중장년층의 눈길을 끌어당겼다. 그랜저는 1988년 서울올림픽 의전 차량으로 사용되면서 성공 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1세대 그랜저는 당시 국내 대형 승용차 수요의 대부분인 9만2571대가 팔리며 국내 최고급 세단 자리에 올랐다.

1992년 나온 2세대 ‘뉴 그랜저’의 캐치프레이즈 역시 ‘성공한 사람들의 차’였다. 뉴 그랜저는 곡선미를 살린 유럽풍의 역동적인 스타일에 중후한 이미지를 넣는 등 외관에 변화를 줬다. 당시 국내 시판 차종 가운데 가장 큰 차체와 실내공간을 갖추는 등 상품성도 끌어올렸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랜저는 기사를 두고 뒷좌석에 타는 최고급 승용차였다.

과거 중장년층이 대부분이었던 그랜저의 타깃층이 젊어지기 시작한 것은 3세대부터다. 1998년 출시된 3세대 ‘그랜저 XG’는 사장님 자동차라는 무거운 이미지에서 탈피해 운전자가 재미를 가지고 타는 고급 자동차로 변신을 시도했다. 이를 위해 현대차는 3년 6개월간 4600억원의 비용을 들였다.

이러한 전략이 먹히면서 3세대는 2세대 판매량의 2배에 가까운 31만1251대가 팔렸다. 4세대인 그랜저 TG는 40만대, 5세대 그랜저 HG는 45만대 이상이 팔렸다. 길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차가 된 것이다.

현대자동차 연구원들이 그랜저 HG에 탑재된 엔진 성능을 테스트하고 있다.

현대차는 2015년 럭셔리 브랜드 제네시스를 출범하면서 그랜저의 포지셔닝에 변화를 주고 있다. 제네시스가 고급차 브랜드로 독립하면서 그랜저는 현대차의 플래그십(기함) 모델로 올라섰다. 아슬란이 있지만 그 위상은 그랜저만 못하다.

6세대 모델인 그랜저 IG는 ‘처음부터 그랜저를 바꾸다’라는 카피를 앞세우며 종전 모델과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기존 1~5세대를 이어왔던 중후한 외관 디자인을 버리고, 보다 날렵하면서 스포티한 느낌을 강조하고 있다.

그랜저를 선택하는 젊은층은 꾸준히 늘고 있다. 6세대 그랜저의 사전계약 고객 중 30~40대 비중이 48%로 기존 5세대보다 7%포인트 증가했다. 특히 신규 유입된 고객 중 30대가 차지하는 비중이 60% 이상을 기록하며 젊고 럭셔리한 대중차 이미지로 거듭나고 있다.

김현철 서울대 교수는 “그랜저는 초기엔 부를 상징하는 사장님 차에서 시작해 지금은 성공한 중년을 위한 준대형 세단으로 탄탄하게 자리매김했다”고 말했다.

인기 비결2. 최신기술 적용한 기술 집약체

현대차는 그랜저를 내놓을 때마다 첨단기술을 적용해 경쟁 차종을 압도했다. 그랜저는 세대마다 당시의 최신 기술을 적용한 현대차 기술의 집약체였다.

1세대 그랜저에는 2ℓ급 엔진과 당시로는 첨단 사양인 정속주행 장치(크루즈 컨트롤)를 장착해 화제를 모았다. 2.0엔진은 우리나라 최초의 전자 제어 연료 분사식이었다. 최대출력 120마력, 최대토크 16.2토크, 최대시속 162㎞/h의 힘을 뽐냈다. 대형차 최초로 전륜구동을 택해 부드러운 승차감을 선보였다. 나중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자동변속기를 장착한 모델을 추가했다.

뉴 그랜저는 국산차 최초로 에어백을 장착했고, 4기통 2000cc부터 6기통 3500cc까지 고배기량 엔진을 탑재했다. 능동형 안전장치(TCS), 차체제어시스템(ECS), 4륜 독립현가장치 등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첨단 안전장치와 편의사양을 선보였다.

그랜저 XG에는 국내 최초로 수동 겸용 5단 자동변속기(H-Matic)를 적용해 국내 대형차 성능 향상을 이끌었다. 특히 그랜저 XG는 일본 미쓰비시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난 모델로, 쏘나타 EF의 전륜구동 플랫폼을 활용해 독자개발됐다. 이 모델은 그랜저 시리즈 최초로 미국과 유럽 시장에 진출해 11만5008대가 팔렸다.

그랜저 TG는 독자기술로 개발한 람다 엔진과 6단 자동변속기를 적용해 엔진 성능은 물론 연비까지 획기적으로 향상됐다. 버튼 시동장치, 에코 드라이빙 시스템 등 각종 편의사양과 첨단기술이 새롭게 적용됐다. 이 모델은 탁월한 승차감과 주행성능으로 입소문을 타면서 여성 및 수입차 선호 고객층까지 흡수했다. 신차 효과가 사라진 1년 후에 오히려 판매량이 30% 늘기도 했다.

2010년 이후 수입차들이 국내시장을 본격적으로 잠식하기 시작했다. 현대차는 이들보다 가격 경쟁력에서 앞섰지만 상품 경쟁력을 자신하긴 어려웠다. 수입차와의 승부를 위해 현대차가 3년 6개월여 동안 총 4500억원을 쏟아부어 완성한 것이 그랜저 HG였다.

그랜저 HG는 차체자세제어장치(VDC), 타이어 공기압 경보장치(TPMS), 급제동 경보 시스템(ESS), 9 에어백 시스템 등 첨단 안전장치를 기본 적용해 안전성을 획기적으로 높였다. 또 국내 최초로 최첨단 주행 편의 시스템인 ‘어드밴스드 스마트 크루즈 컨트롤’을 적용하는 등 한층 진보된 편의사양을 갖췄다. 최첨단 기술과 젊어진 디자인은 실적으로 이어졌다. 그랜저 HG는 월간 판매 1위(2011년 4월)를 달성할 정도로 인기를 모으며 국산 고급 세단의 자존심을 지켰다.

이항구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그랜저는 지난 30년 동안 지속적으로 상품성을 높이면서 장수모델의 입지를 다졌다”며 “그랜저가 경쟁차의 기술혁신을 이끈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인기 비결3. 품질경영으로 소비자 신뢰 확보
내외부 디자인 개선을 비롯해 안전과 편의사양 확대, 고객 요구 반영 등 그랜저의 상품성 근간은 '품질경영'이다. 정몽구 현대차 회장은 품질경영으로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변두리 자동차 회사였던 현대차를 세계 5대 완성차 업체로 만들었다. 이러한 품질경영의 중심에 있는 것이 바로 그랜저다.

현대모비스의 모듈 경쟁력은 현대자동차의 품질 경쟁력으로 이어진다. 현대모비스는 자동차의 핵심 기술 확보에 주력하고 있다.

정몽구 회장은 “브랜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고객이 믿고 탈 수 있는 자동차를 만드는 것”이라며 “그 기본이 바로 품질”이라고 강조해 왔다. 또 품질 안정화를 넘어 고객에게 감동을 주는 품질 고급화를 임직원들에게 항상 강조했다.

정몽구 회장은 2000년대 초반 2010년 글로벌 톱 5에 진입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공장장들을 불러서 한 달에 한 번씩 직접 품질회의를 주재했다. 세계 프리미엄 차 시장을 주도하는 고급차를 분해해 빠짐없이 분석했다. 또 국내외 공장을 비롯해 제품의 밑바탕이 되는 현대제철소를 직접 찾기도 했다.

특히 그랜저·제네시스 등 고급차는 기획에서부터 마케팅까지 정몽구 회장이 직접 챙기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최고 경영진의 관심 덕분에 그랜저는 글로벌 톱 브랜드와 당당히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됐다.

그랜저(현지명 아제라)는 2016년 6월 미국 시장조사 업체 JD파워의 신차 초기 품질평가에서 대형 차급 부문 1위에 올랐다. 10월에는 미국 소비자 잡지 ‘컨슈머리포트’의 신뢰도 조사에서 대형차 부문 ‘가장 신뢰할 만한 차’에 선정됐다.

이항구 연구위원은 “신형 그랜저의 초반 돌풍엔 그동안 그랜저가 축적해왔던 소비자들의 품질에 대한 신뢰가 그대로 반영됐다”고 분석했다.

그랜저 품질의 밑바탕에는 부품 계열사인 현대모비스의 모듈 경쟁력도 깔려 있다. 자동차의 품질 경쟁력은 결국 모듈 생산방식의 선진화와 맞닿아 있다. 수많은 부품을 조립영역이나 기능별로 결합해 완성차 생산라인에 공급하는 부품 단위인 모듈의 경쟁력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얘기다. 현대모비스는 모듈을 공급받는 현대차와 동일한 서열로 모듈 생산이 이뤄지는 직서열 방식(JIS·Just In Sequence)을 갖추고 있다. 자동차 생산 공정과 똑같은 시간대에 부품이 생산돼 재고가 발생하지 않는다. 또 단계에 따라 정확한 부품이 조립될 수 있도록 최첨단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현대·기아차가 글로벌 경쟁력을 높일 수 있었던 또 다른 요인으로 현대제철도 꼽힌다. 그랜저뿐만 아니라 현대·기아차에서 생산하는 다양한 자동차에 쓰이는 고품질의 자동차 강판을 공급하기 때문이다. 현대제철이 2015년까지 개발한 자동차용 강판은 89종에 달한다. 이번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신형 그랜저에는 2015년 연말 개발된 초고장력 강판이 적용됐다.

김수욱 서울대 경영대 교수는 “현대·기아차가 현대제철에서 맞춤형으로 개발한 차량 강판을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은 향후 더 큰 경쟁력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랜저는 이제 우리나라 준대형 고급 승용차를 통칭하는 대명사가 됐다. 여전히 성공하는 사람이 갖고 싶어 하고, 선망하는 차다. 1세대 그랜저는 당시 직장인들에게 드림카였고, 30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샐러리맨의 로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