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 인공지능이 이세돌 9단을 누른 '알파고 쇼크' 이후 한국 사회는 '4차 산업혁명'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에 떨고 있다. 초고속 인터넷으로 대변되는 정보화 혁명에 한발 앞섰지만, 인공지능·빅데이터·사물인터넷(IoT)이 빚어내는 4차 산업혁명에는 뒤처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럴 때일수록 주목해야 하는 것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묵묵히 새 시대를 준비하고 있는 산업현장이다. 조선비즈는 새해 기획으로 4차산업 생생현장 7곳을 다녀왔다. 새 길을 개척하느라 분주한 현장에서 정치·정책 리더십의 실종과 사교육 창궐, 규제 난맥을 타파할 희망의 메시지를 발견했다. [편집자주]

“우리 아이가 내년에 초등학교 들어가는데 또래들보다 키가 작아서 걱정이에요. 혹시 성장판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닐까요?”

서울 송파구 소재 서울아산병원 소아청소년과 진료실. 내년에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하는 30대 학부모와 아이가 근심어린 표정으로 진료를 받고 있다. 이들은 키가 너무 작아 학교에 들어가면 친구들에게 놀림 당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과 함께 아이가 잘 크지 않는 이유가 궁금해서 병원을 찾은 것이다.

또다른 40대 학부모는 같은 연령의 아이보다 작아 보이는 초등학교 4학년 여자아이를 데리고 진료를 받으러 왔다. 이 아이는 또래들보다 생리를 일찍 시작했다. 성 조숙증에 대한 우려도 있는 데다가 키도 작아 성장에 문제가 생길 것을 걱정한 부모가 결국 병원 문을 두드렸다.

소아청소년과 의사는 몇 가지 검사를 해보자고 제안한다. 우선 왼손을 엑스레이(X-레이)촬영을 해 골 연령을 판독해 보고 성장이나 성 조숙증과 관련된 내분비 검사나 유전 질환 검사를 해 볼 수 있다.

아이의 왼손 X-레이 촬영 영상은 영상의학과로 넘어간다. 영상의학과 의사들은 왼손 X-레이 사진을 판독하고 해당 아이의 ‘골 연령’을 평가한다. 가령 8살 아이인데 골 연령이 6살로 판독되면 아직 더 성장할 여지가 남아 있으니 우려할 만한 상황은 아니라는 식이다.

서울아산병원 의료진이 영상의학과 소아판독실에서 실제로 AI를 활용한 영상 판독을 설명하고 있다.

서울아산병원에는 일주일에 약 100명 가량의 아이가 키 고민 때문에 소아청소년과를 찾는다. 최근 들어 키와 외모가 경쟁력이 되면서 이같은 문제로 병원을 찾는 이들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영상의학과에서 판독해야 하는 왼손 X-레이 영상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는 의미다.

문제는 X-레이 영상을 보고 골 연령을 판독하는 데 평균 5분 가량 소요된다는 점이다. 책자로 된 연령별 가이드라인 영상을 뒤적이며 진료를 의뢰한 아이의 X-레이 영상과 비교 분석하며 골 연령을 판독한다. 영상의학과에 판독을 요청하는 의료영상은 골 연령 영상만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인공지능(AI) 영상 판독 연구를 진행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인공지능(AI)으로 골 연령 영상을 판독하는 기술력을 보유한 뷰노코리아와 약 1년 넘게 연구한 결과 판독 시간을 20초로 줄였습니다. AI가 아니면 절대 해낼 수 없는 일을 해내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12월 28일 서울아산병원 현장에서 만난 이진성 서울아산병원 영상의학과(소아영상 전문) 교수의 말이다. 이처럼 AI로 대표되는 4차 산업 혁명은 의료 및 헬스케어 현장에 빠르게 녹아들고 있다.

◆ 딥러닝으로 X-레이 영상 스스로 학습...“20초면 충분한 시간”

서울아산병원 영상의학과 의료진은 2014년 초부터 골 연령을 보다 효율적이고 빠르게 판독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X-레이 영상은 병원의 입장에서 볼 때 수익성이 높은 분야가 아닌 데, 최근 들어 골 연령 판독 의뢰가 늘어나면서 판독해야 할 영상이 계속 쌓이고 있는 상황이었다.

의료진이 기존에 영상을 판독할 때 참조하던 가이드북. 일일이 책자를 찾아가며 유사한 이미지를 찾아 분석하고 판독해야 한다. 해외서 제작됐기 때문에 한국인에 맞지 않는 경우도 있다.

뭔가 자동화를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를 고민하던 이진성 교수는 우연한 기회에 인공지능 관련 스타트업인 뷰노코리아와 조우했다. 뷰노코리아의 딥러닝 기술력을 보고 골 연령 판독 영상을 딥러닝으로 해결할 수 있는 연구를 공동으로 하자고 제안했다.

2015년부터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한 서울아산병원 의료진과 뷰노코리아는 1년 넘게 연구한 결과 골 연령 판독 소프트웨어를 완성했다. 이미 판독한 수 만장의 영상 데이터를 딥러닝으로 컴퓨터에 학습시키면 연령별 골 상태를 구분하는 중요한 이미지 특징을 스스로 학습하는 방식으로 연구는 진행됐다.

현장에서 실제로 판독하는 장면을 지켜봤다. 새로운 영상을 입력하면 이미 데이터를 학습한 컴퓨터는 가장 일치할 확률이 높은 골 연령 이미지 3개를 알려준다. 영상의학과 의사는 이를 실제 판독하고자 하는 영상과 비교해 가장 적합한 영상을 최종 결정한다. 근접한 이미지 후보군이 화면에 뜨는 데는 2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진성 교수는 “근접한 이미지가 뜨는 데 2초, 살펴 보는 데 5초, 최종 판단하는 데 10여 초가 걸리기 때문에 총 20초 안으로 골 연령을 정확히 판독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영상의학과에서 골 연령을 판독하면 소아청소년과 의사는 적절한 처방을 해 준다. 나이에 비해 골 연령은 낮으니 성장 호르몬 치료 등을 제안하는 것이다.

◆ 개인정보 유출 원천 차단...보수적인 의료계의 혁명 시작

서울아산병원 의료진과 뷰노코리아의 공동연구는 연구 목적으로 환자들의 영상 데이터를 활용했다. 데이터 연구용으로 서울아산병원 임상연구윤리위원회의 임상 연구 승인을 받았다.

이진성 서울아산병원 영상의학과 교수(왼쪽)가 뷰노코리아와 공동 연구한 AI 기반 골 연령 판독 SW를 실제로 시연하고 있다.

이진성 교수는 골 연령 판독 AI 소프트웨어는 개인정보 유출 문제를 사전에 차단했다고 전했다. 이 교수는 “환자의 영상만 컴퓨터로 입력한다”며 “익명으로 처리된 이미지만 판정하는 것이지 외부 네트워크와 연결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환자의 나이나 인적 정보 유출에 대한 우려는 없다는 것이다.

그는 새 기술을 의료 현장에 도입하는 데 보수적인 의료계 현장의 시각이 이제 달라져야 한다고 전했다. 그는 “의사의 진료를 보조하는 신기술이라면 마다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며 “골 연령 판독의 경우,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는 것이 정확도가 더 높아 이제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영상을 판독하기 어려울 정도가 됐다”고 밝혔다.

그는 “암이나 종양, 혈관 등에 AI 진단을 적용하려면 더 많은 기술적 요소가 필요할 것”이라며 “소아영상 전문의 입장에서는 우리가 개발한 진단 소프트웨어만으로도 충분히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번 인공지능 기반 진단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기 전까진 해외서 제작된 가이드라인 책자를 따랐다. 이 교수는 “5만 명 이상의 데이터가 축적되면 한국인에 맞는 표준 골 연령 가이드라인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인공지능 진단 소프트웨어, 국내 첫 식약처 인허가 추진

서울아산병원과 뷰노코리아는 골 연령 인공지능 판독 소프트웨어에 대해 의료기기 2등급으로 식약처 인허가를 준비 중이다. 의료기기는 인체 위험도에 따라 통상 4개의 등급으로 분류돼 인허가를 받는데 등급이 높을수록 허가가 까다로워진다.

인공지능 영상 진단 소프트웨어는 얼마 전까지 의료기기 3등급 인허가 대상으로 분류됐다. 의료기기 3등급은 인체에 바늘을 꽂거나 약물을 직접 투여하는 경우에 해당된다.

서울아산병원과 뷰노코리아의 공동 연구 결과물인 골 연령 판독 AI 진단 소프트웨어는 의료기기 2등급으로 인허가를 추진하는 첫 사례가 된다.

김현준 뷰노코리아 이사는 “인허가를 신청하고 60일이 지나면 리뷰를 받는데 리뷰를 받은 뒤 다시 30일 내에 회신을 주는 과정을 거치면 보통 3~4개월 안에 인허가 여부가 결정될 것”이라며 “인허가를 받으면 소프트웨어 패키지로 판매해, 인공지능 진단 소프트웨어라는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외 유명 의료기기 기업들이 서울아산병원과 뷰노코리아가 공동 연구한 AI 진단 소프트웨어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현준 이사는 “의료 장비 업체들이 이 소프트웨어를 각사 장비에 추가하려는 관심을 내비치고 있다”며 “4차 산업혁명이 새로운 비즈니스를 창출해 나가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