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영등포구에 사는 직장인 전모(남·33)씨는 최근 신던 구두를 싹 바꿨다. 온라인 쇼핑몰에서 10만원대 구두를 사서 쓰던 그는 이번엔 영국 노스햄튼(Northampton) 지역에서 장인들이 만든 구두를 샀다. 한 켤레에 60만원대로 기존에 쓰던 것보다는 6배 이상 비싸다. 구두약은 최고급 소재로 만들었다는 프랑스산 제품으로, 구둣솔은 말털로 만들었다는 5만원대 독일산 제품으로 바꿨다.

전씨는 “차나 시계를 바꾸자니 직장인으로서 경제적으로 부담스러워 구두랑 관련 용품만 최고급 제품으로 바꿔 기분 전환을 해봤다”며 “무리할 정도로 큰돈을 쓰지 않고도 만족스러운 기분을 낼 수 있다"고 말했다.

◆ ‘차·의류·핸드백’은 못 사더라도…‘칫솔·치약’은 최고급으로

‘큰 소비’를 통한 행복감보다 ‘작은 사치’ 즉, ‘스몰럭셔리(small luxury)’ 제품으로 만족을 찾는 소비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스몰 럭셔리란 외제차나 고가품 브랜드 의류·핸드백에 큰돈을 쓰기는 어렵지만, 대신 작은 규모의 고급 소비재나 고급 식품을 구매해 비싼 제품을 소비하는 것과 동일한 만족감을 얻으려는 현상을 일컫는다.

대표적인 스몰 럭셔리 상품인 일본 미소카 수제(手製) 칫솔(왼쪽), 이탈리아의 마비스 치약(가운데), 네덜란드산 포마드 ‘리우젤’.

1930년대 미국의 대공항 시절, 경제학자들은 경제가 어려워 전체적인 소비가 줄어들었는데도 저가 상품인 립스틱 매출은 오르는 특이한 현상이 나타난 것을 보고 '립스틱 효과(Lipstick effect)'라고 칭했다. 립스틱 효과가 뷰티에 한정된 용어라면, 스몰 럭셔리는 잡화·식품 등 다양한 상품으로 립스틱 효과의 범위가 확대된 개념이다.

스몰 럭셔리 아이템에 지갑을 여는 소비자들이 늘어나면서 패션업계의 전반적인 침체 속에서도 잡화 시장은 꾸준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신세계백화점에 따르면 2014년, 2015년 패션 부문 전체 매출액은 줄어든 가운데 잡화 부문은 2년 연속 1.4%씩 성장했다. 올해 잡화 부문 매출액은 전년 대비 6.1%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올해 패션 부문 전체 매출 증가율인 2.6%의 두 배를 넘어서는 수준이다.

수제(手製) 칫솔로 유명한 일본의 미소카 칫솔(1개당 1만2000원)과 미국의 테오던트, 이탈리아의 마비스, 영국의 유시몰, 스위스의 벨레다 등 1만원대 고가 치약은 백화점 매장에서 날개 달린 듯 팔렸다.

◆ 남성도 동참…‘경기불황이 주 요인’

국내 중견 제화 브랜드 금강제화가 올해 선보인 남성 수제화 '헤리티지 세븐·S' 역시 49만9000원이라는 높은 가격에도 초도 물량이 모두 팔렸다. 미용에 관심을 두는 남성이 늘면서 35g에 2만원을 웃도는 네덜란드산 포마드 ‘리우젤’은 인터넷 쇼핑몰에서 인기상품 목록 최상단에 올랐다.

20·30세대 남성들이 국내 중견 제화 브랜드 금강제화 매장을 찾아 구두를 살펴보고 있다.

식품업계에서는 1만~2만5000원을 웃도는 프리미엄 커피가 인기를 끌고 있다. 중남미 국가 파나마에서 재배된 ‘게이샤’ 품종의 커피를 마시면 감귤과 꿀맛, 꽃향기가 난다. 마치 홍차를 마시는 느낌이 든다. 이 품종은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아 구하기 어려워 가격도 비싸지만 국내에 원두가 수입됐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해당 매장에 줄이 늘어설 정도로 소비자 반응이 좋다.

한국 커피협회 관계자는 “스타벅스가 국내에 처음 들어왔을 때만 해도 ‘커피 한잔에 5000원이 말이 되느냐’는 의견이 많았지만, 이제 좋은 원두로 만든 커피라면 1만원을 낼 용의가 있는 소비자들이 적지 않다”며 “본인이 좋아하는 분야에서는 어느 정도 돈을 지불하고서라도 스스로 위로하고, 즐기려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소소한 사치’가 인기를 끄는 이유는 명확하다. 저성장 시대가 이어지며 체감경기가 나빠졌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스몰 럭셔리 현상이 일어나는 시기는 불황과 맞물린다.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소비자들이 적은 비용으로 행복감을 얻을 방법을 스스로 찾아내는 과정에서 이런 현상이 나온다.

김민정 KB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2030세대는 불확실한 미래에 투자하는 것보다 현재의 만족을 위해 소비하는 성향이 뚜렷해지고 있다”며 “소비를 통한 찰나의 행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아끼고 저축하던 이전 세대와 다르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