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연구개발(R&D)의 모토는 메디컬 이미징 솔루션(디지털 의료기기)의 ‘글로벌 대중화’입니다. 비싼 장비가 아니고 좋은 기술로 대중화를 일으키겠다는 말이죠. 의류업계의 유니클로(UNIQLO)나 자라(ZARA) 같이 말입니다.”

신철우 디알텍 부사장은 디알텍의 경영 목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연세대학교 세라믹공학과를 졸업한 신 부사장은 디알텍 R&D센터의 최고기술경영자(CTO) 이기도 하다. 그는 “우리는 돈만 벌려고 일하지 않는다. 이 일이 세상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책임을 다하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디알텍 본사 내부에 있는 기술개발 실험 기기.

지난 11월 25일 경기도 성남시에 있는 디알텍 본사를 방문했다. 본사 내부에는 기술개발을 위한 실험실과 장비가 보였다. 디알텍은 한화에이스기업인수목적(스팩·SPAC)1호와의 합병을 통해 12월 5일 코스닥 시장에 상장된다.

지난 2000년 설립된 디알텍은 자체 연구·제조 시설을 보유한 엑스레이 디텍터 제조 전문 기업이다. 디알텍의 주력 제품은 디지털 엑스레이 장비 핵심 부품인 평판형 디지털 엑스레이 디텍터다.

◆ LG·SK 출신 인재들이 모여 설립…“상상보다 10배 더 힘든 시기”

디알텍은 LG디스플레이(034220)출신의 윤정기 전 대표가 설립했다. 윤 전 대표가 LG디스플레이 재직 당시 세계 분자진단기기 2위 기업인 홀로직이 디텍터용 박막 트랜지스터(TFT)를 만들어 달라는 요구를 해왔다. 그 때 윤 전 대표는 디텍터 분야의 미래 가능성을 봤다. 그리고 2000년 회사를 나와 디알텍을 세웠다.

신철우 디알텍 부사장. 그는 디알텍의 창립멤버로 지난 16년 동안 디알텍에서 일했다.

신 부사장은 당시 SK대덕연구원에서 일하고 있었고, 핵심 프로젝트를 주도적으로 맡아 진행하는 등 유능한 인재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일하는 동안 이곳에 안주하는 것이 내가 정말 원하는 미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는 “그러던 중 지인의 소개로 윤 전 대표를 만났고, 두달 동안의 심사숙고 뒤 이 사업이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어 회사를 나와 이곳에 합류했다”고 말했다.

신 부사장은 “창립 멤버는 나를 포함해 LG·SK 출신 5명이었다”며 “그런데 현실은 정말 상상할 수 없었던 ‘헝그리 벤처’였다”고 회상했다. 그는 “내가 디알텍에 합류할 당시 벤처 버블 논란이 일면서 순식간에 수많은 회사들이 어려워졌다”며 “벤처가 힘들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10배는 더 힘들었다. 돈이 정말 없었다”고 말했다.

당시 디알텍 본사는 서울시 강남구에 있는 ‘메디슨(현 삼성메디슨)’의 별관에 있었다. 신 부사장은 “사업 초기 메디슨이 우리를 좀 키워보려고 했는데 메디슨 자체가 상황이 어려워졌다”며 “자금이 다 떨어지면서 본사를 충청북도 청원시로 옮기게 됐고, 당시 창립 멤버 2명이 회사를 나갔다”고 했다.

그 와중에도 솟아날 구멍이 보였다. 중소기업청과 충청북도가 디알텍을 지원한 것이다. 신 부사장은 “도 차원에서 기술신용보증을 담보로 해 어느 정도의 자금을 빌릴 수 있었다”며 “그 자금으로 현재 우리 주력 제품인 직접 방식 디텍터의 핵심 기술을 개발했다”고 말했다. 이를 기반으로 2002년 첫 제품을 만들어 판매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해 용인시 동백지구에 있던 옛 진로 연구소의 벤처 단지로 본사를 옮겼다.

그러나 고난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그들이 입주한 건물주 회사가 망한 것이다. 신 부사장은 “건물주 뿐 아니라 그 단지에 입주했던 회사가 대부분 망해서 나갔다”며 “건물주가 건물 관리도 포기하는 바람에 우리는 물도, 전기도 자력으로 끌어다 쓰고 건물 청소도 직접 했다. 겨울에는 난방도 안돼서 간이 난방 기구를 두고 일했다”고 회상했다.

신 부사장은 “당시 창립 멤버들 나이가 30~40대였다. 2002년부터 2004년까지 월급을 절반만 받거나 아예 받지 못한 날들이 이어졌다”고 말했다. 그는 “한 번은 카드값을 못냈는데, 금액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겨우 50만원을 갚지 못해 쩔쩔 맸다”며 “힘들었지만, 내 비전과 확신이 맞다는 생각으로 버텼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후회는 하지 않았다. 그 시간에 기술을 하나라도 더 개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 ‘헝그리 정신’으로 기술개발 매진

힘들 수록 이를 악물고 기술개발에 매진했다. 당시 디알텍은 셀레늄 소재의 의료기기를 개발하고 있었다. 홀로직, 도시바 등 글로벌 대기업도 자체 기술 확보에 실패한 어려운 기술이었다. 심지어 그 기술을 연구한다는 소식에 디알텍을 찾은 홀로직 수석 부사장은 신 부사장이 개발 과정을 설명하는 도중 “그 기술은 정말 어려운 기술”이라며 “당신들은 절대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기술개발에 성공했고, 지난 2003년 제품을 출시했다. 신 부사장은 “출시 초기에는 반응이 별로였다. 한 개 팔아서 한달을 넘기고, 두 개 팔면 좀 따뜻한 정도였다”며 웃었다.

2004년부터 매출이 본격적으로 발생하기 시작했다. 현재 미국 동물용 기기 시장 점유율 1위인 아이덱스(Idexx)와 제품 수주를 맺었다. 매출액은 2005년부터 차근차근 증가세를 보였고 2006년 100억원 매출액 달성에 성공했다. 신 부사장은 “그 때부터 월급도 잘 받게 됐다”고 말했다. 이후에도 성장은 지속됐고 2008년 매출액은 200억원을 돌파했다.

그러나 그들은 안주하지 않았다. 신 부사장은 “우리가 채택한 직접 방식 제품 시장 규모는 간접 방식 시장에 비해 규모가 매우 작아 성장에 한계가 있었다”며 “2013년부터 간접방식 기술 개발에 착수했고, 2014년 말에 제품을 출시했다”고 말했다.

디알텍의 올해 상반기 매출액은 183억원, 영업이익은 20억원을 기록했다. 신 부사장은 “지난 2015년부터 간접 방식 디텍터의 판매가 활성화돼 연 매출액 300억원을 돌파했다”고 설명했다.

◆ ‘프리미엄급’ 제품 개발 원칙... 글로벌 의료기기의 대중화 목표

신 부사장은 “제품을 개발하면서 항상 최고 수준을 고집한다”며 “또 이미 시장에 나온 제품은 절대로 쫓아서 만들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고 그만큼 보안도 철저히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아주 싼 염가 제품을 만들자는 얘기가 나온 적도 있지만, 나는 품질과 성능은 철저하게 프리미엄급을 유지해야 한다고 밀어붙였다”며 “그래야 중장기적으로 디알텍 브랜드를 탄탄하게 구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 결과는 ‘최초’ 타이틀로 이어졌다. 디알텍은 세계 최초로 24시간 배터리 교체 없이 엑스레이 검진이 가능한 디텍터 무선충전시스템, 슬림 카세트형 여성 유방 촬영용 디지털 엑스레이 디텍터 등을 개발했다. 또 지난 2003년 국내 최초이자 세계 5번째로 디지털 엑스레이 휴대용 디텍터를 개발했다.

디알텍 본사 출입구에 보안을 강조하는 메시지가 붙어있다.

신 부사장은 “처음 나온 제품에 대해 사람들이 극찬해 줬을 때 항상 마음이 벅차다”며 “직원들에게 ‘세계 최초라는 것을 경험해 본 적이 있는가, 우리가 그것을 이룩한 사람들이다. 자부심을 가지라’고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기술개발에서는 생각을 모으는 것이 중요하다”며 “보통 아주 똑똑한 사람들이 뭔가를 해낸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똑똑한 한 사람이 해낼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신 부사장은 “특히 의료기기를 취급하는 만큼 사람의 생명을 보존할 수 있다는 뿌듯함도 느끼고 있다”며 “국내 의료 기기 시장에서 대부분 고가의 외산을 사용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 3분의 1 가격으로 최고 성능을 내는 제품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디알텍을 통해 전 세계 디지털 의료기기 시장의 대중화가 이뤄지길 바란다”며 “이번 공모 자금을 국내외 영업망 확충에 주력으로 투자할 계획이며, 그를 발판으로 세계적인 한국 의료기기 기업으로 성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