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 없으면 니네 부모를 원망해. 돈도 실력이야.”

박근혜 정부 국정 농단 혐의로 검찰 구속 수사를 받고 있는 최순실(60∙최서원으로 개명)씨 딸 정유라(20∙개명 전 정유연)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이 말(글) 한마디는 나라를 ‘수저론’으로 갈라놓으며 수천만 ‘흙수저’의 공분을 샀다.

부모 ‘덕’에 학교 출석을 제대로 하지 않아도 졸업할 수 있고, 능력과 자격이 안 돼도 부모 ‘빽'으로 없던 규정까지 만들어 대학에 들어간 당사자의 이 말(글)은 아무리 곱씹어봐도 타인에 대한 배려나 염치는 눈 씻고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가 없다.

돈 없는 부모를 원망하라는 몰염치∙무개념 발언을 툭 쏟아내는 사람이 이 나라에 어디 정씨뿐일까. 살펴보면 부모 재력과 빽에 기대 이런 말을 스스럼없이 하고 편 가르기를 하는 이들은 우리 주변에 꽤 많다.

초등학생만 봐도 아찔하다. 아직 열 살도 채 안 된 아이 입에선 ‘휴거’라는 말이 나온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지은 임대아파트 브랜드 ‘휴먼시아’와 ‘거지’의 첫 글자를 딴 합성어인데, 임대주택에 사는 학생들을 ‘왕따’시키며 부르는 말이다.

[기자수첩] 휴거에 멍든 동심(童心) <2016.03.11>

공부를 잘하려면, 또 나쁜 길로 빠지지 않으려면 임대주택에 사는 친구는 사귀지 말라고 했을 부모의 삐딱한 ‘가르침’이 한몫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어릴 때부터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에 대한 선 긋기를 일찌감치 배운 탓인지, 젊은 세대일수록 편을 가르듯 ‘숟가락’ 색을 쉽게 구분하고 또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대학가도 ‘계급 집단’이란 말이 꽤 잘 어울릴 정도로 변했다. 예전 학력고사 세대라면 340점 만점(체력장 20점 포함)의 대학입학 학력고사 시험 성적 하나만으로 대학에 들어갔지만, 요즘 수학능력평가(수능) 세대는 수시와 정시에 따라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전형 기회가 엄청나게 많다 보니 입학 후에도 ‘출신 성분’에 따라 서열이 매겨진다. 수시와 정시인지, 특목고와 일반고 출신인지, 농어촌 전형이나 사회적배려대상자 전형 등을 통해 입학했는지 등을 따져 같은 학과 안에서도 보이지 않는 서열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대학을 나와 사회에 진출하고 내 집이라도 한 칸 마련해야겠다 싶으면 이때부터 암묵적으로 그어진 ‘계급선’을 뛰어넘기 힘들어진다. 3.3㎡당 4000만원이 넘는 강남 아파트 청약은 고사하고, 어지간한 아파트 한 채 마련하기도 혼자 힘으론 버겁다. 통계청에 따르면 20~30대가 월급을 단 한 푼도 안 쓰고 12년 6개월을 꼬박 모아야 서울의 평균 아파트(5억5480만원, 한국감정원 시세 기준)를 살 수 있다. 그나마 이것도 39세 이하 가구주의 월평균 처분가능소득(371만원)을 하나도 쓰지 않는다는 불가능한 가정에서 나온 통계지, 생활비와 세금 등을 내고 나면 실제 내 집 마련에 걸리는 시간은 2~3배 이상 늘어난다. 부모가 재산을 물려주지 않고서는 보통 월급쟁이로서 내 집을 마련하기란 ‘넘사벽(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에 가까울 정도다.

같은 강남, 같은 단지 안에 살아도 흙수저 임대 가구는 서럽다. 외부에서 볼 때 일반∙임대 가구를 구분할 수 없게 섞어 짓도록 한 ‘소셜믹스’ 제도도 있지만, 분양 받아 사는 사람들은 임대 가구 때문에 집값에 영향을 받는다고 늘 불만이다. 심지어 강남의 한 공공임대 단지가 시공업체 브랜드를 붙여 단지 이름을 바꾸려 하자 같은 시공사의 브랜드를 단 주변 민간분양 아파트 주민들이 “임대아파트는 구별해야 한다”고 구청에 항의하면서 갈등을 빚기도 했다. 사정이 이 정도면 흙수저가 금수저 틈에 끼여 살기란 여간 눈치 보이는 일이 아니다.

이 땅의 금수저와 흙수저는 도저히 같이 어울릴 수 없는 것일까. 머슴 출신 진승(陣勝)이 진나라 말기 중국 최초의 농민 반란을 이끌며 “왕후장상의 씨가 어찌 따로 있겠는가(王侯將相 寧有種乎)”라고 외친 때가 기원전 3세기다. 지금의 우리 모습은 어떤가. 안타깝지만 대한민국의 수천만 흙수저들은 21세기판 왕후장상의 씨를 물려받은 금수저들과 힘든 신분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