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가 지주회사 전환을 검토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밝히면서 내년에 '인적분할'을 통한 재계의 지배구조 개편 작업이 급물살을 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삼성전자는 지난 29일 미국의 행동주의 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 측이 지난달 초 공개 제안한 지주회사 전환을 6개월의 중장기 과제로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삼성전자가 지주회사와 사업회사로 분할될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다.

재계에서는 더 나아가 삼성전자 지주회사와 삼성물산이 합쳐져 삼성물산 최대주주(17.08%)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삼성그룹 경영권 승계가 마무리되는 수순을 밟을 것으로 예상한다.

재계에서는 삼성 뿐 아니라 다른 주요 그룹들도 ‘인적 분할'을 통한 지배구조 개선이나 승계 작업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삼성에 이은 다음 주자로 꼽히는 곳은 SK, 현대자동차, 롯데 등이다.

이들 그룹은 아직 유보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지만 삼성이 물꼬를 뜨면 다각도의 검토 작업에 나설 수 있다는 전망에 힘이 실린다. 순환 출자 중심의 지배구조를 단순화해 오너의 경영권을 강화하거나 후계 승계 작업에 나서는 데 인적 분할이 유용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인적분할 때 자사주 활용을 제한하는 경제민주화 법안이 발의된 점도 그룹들이 인적분할에 속도를 낼 것이라고 전망되는 주된 이유 중 하나다. 통상 자사주가 경영권 방어에 쓰이기 때문이다. 재계에서는 현대중공업과 오리온 등이 최근 인적분할을 결정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다만 전문가들은 여러 차례의 주식 스왑 등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이런 작업이 단기간에 이뤄질 수 없다고도 분석한다. 1999년 LG그룹의 지주회사 전환 때와 같이 2~3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밟아나갈 것으로 본다.

◆ 삼성 이어 SK·현대차·롯데 인적분할 주목

삼성에 이어 지배구조 개편과 관련해 주목받는 그룹은 SK다. 최태원 SK 회장은 지난달 SKMS연구소에서 열린 그룹 CEO세미나에서 경영효율화를 위해 지배구조 개편을 주문했다.

재계와 증권시장 관계자들은 SK텔레콤의 인적분할에 주목한다. SK텔레콤이 인적분할을 통해 중간지주회사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SK그룹 지주회사 SK㈜의 손자회사인 SK하이닉스를 자회사로 승격시키면 SK하이닉스의 활용도를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현행 공정거래법상 지주회사의 손자회사는 지분 100% 소유에 한해서만 증손회사를 만들 수 있어 지금과 같은 지배구조로는 SK하이닉스가 M&A에 나서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또 SK하이닉스가 SK㈜의 자회사가 되면 최태원 회장 등 총수 일가가 받을 배당이 늘어날 수 있다. SK하이닉스 수익은 SK텔레콤을 거쳐 지주회사인 SK㈜로 반영되는데, 지배구조 변화로 SK텔레콤을 거치지 않으면서 지분법 이익이 늘어날 수 있는 구조가 된다. 최 회장이 그룹의 지배력을 더욱 높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현대자동차그룹도 복잡하게 얽힌 순환출자 구조 해소가 필요한 상황이다. 지금은 현대모비스가 현대자동차를, 현대자동차가 기아자동차를, 기아자동차가 현대모비스를 지배하는 순환출자 구조다. 정몽구 회장이 현대모비스 지분 6.96%를 보유하고 있어 현대모비스를 지주회사격으로 보고 있다.

이런 순환 출자 구조를 개선하기 위해선 인적분할을 거쳐 지주회사가 계열사 출자 지분을 가져오는 작업이 필요하다. 오너의 출자구조상 인적분할을 통해 지주회사를 만든다면 현대모비스가 유력하다. 현대차그룹은 모비스를 지배하면 그룹 전체를 지배할 수 있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다만 현대차그룹은 이 과정에서 정의선 부회장의 승계 작업을 위한 묘수를 짜내야 하는 숙제가 있다. 정 부회장의 그룹 승계 방안으로 정 부회장 보유 글로비스 지분과 기아차 보유 모비스 지분의 교환이 거론되기도 했다.

윤태호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모비스를 인적분할하면 기아차는 모비스 홀딩스 지분 16.9%와 모비스 사업회사 지분 16.9%를 보유하게 된다"며 "정 부회장이 기아차가 보유하는 모비스 홀딩스 지분 16.9%를 취득할 수 있다면 승계 작업은 끝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롯데는 앞서 지주사 체제 전환을 선언했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지난달 검찰 수사가 마무리되고 경영쇄신안을 발표하면서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겠다"고 밝혔다.

롯데는 ‘롯데쇼핑→대홍기획→롯데정보통신→롯데쇼핑’과 ‘롯데제과→롯데푸드→대홍기획→롯데제과’라는 순환출자를 해소해야 한다. 여기서 롯데쇼핑의 지분 정리가 우선 과제로 꼽힌다. 비용 측면에서는 호텔롯데와 롯데쇼핑, 롯데제과를 모두 사업회사와 지주회사로 나누고, 지주회사들을 합치는 방안이 거론된다. 롯데쇼핑, 롯데제과 지분을 가지고 있는 하위 계열사들은 사업회사 지분을 갖고, 그 위에 지주회사를 두면 큰 비용 부담 없이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 경제민주화 앞서 재편 채비…"3년은 걸리는 작업"이라는 지적도

기업들이 인적분할 화두를 서둘러 꺼내야만 하는 배경도 있다. 여소야대의 정치구도 아래 야권이 자사주 의결권 제한 법안을 밀고 있다. 법안의 통과 가능성도 높다는 게 중론이다. 하나대투증권은 "해외에서도 분할 신주 배정 등이 일반적이지 않아 통과 가능성이 충분하다"며 "최근 정국 혼란에 따라 야당의 입지가 더 넓어졌다는 점도 한몫한다"고 했다.

이 법안은 회사의 자금으로 취득한 자사주를 총수 일가의 지배력 강화에 사용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했다. 기업들이 이 법안 통과 이전에 지배구조 개편을 서둘러야 한다는 분석이 나오는 배경이다. 통상 지주회사를 설립하기 위해 인적분할 때 자사주를 지주회사에 배정해 사업회사에 대한 사실상 오너의 지배력을 높인다.

이런 측면에서 발빠르게 나선 기업들도 있다. 현대중공업은 지난 15일 비(非) 조선부문을 모두 분사해 6개 기업으로 쪼개기로 했다. 이는 조선산업의 수주절벽에 대응하기 위한 자구책이기도 하지만 지주회사 체제로 지배구조를 전환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이번 분사에서 현대중공업이 보유한 자사주(13.36%)와 현대오일뱅크 지분(91.9%)을 넘겨받은 현대로보틱스가 현대중공업의 사실상 지주회사로 부상했다.
그러나 인적 분할을 통한 지배구조 개편 작업은 복잡한 단계를 거치기 때문에 시간이 적지 않게 소요된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지배구조 개편은 공깃돌을 옮기는 수준의 작업이 아니다"라며 "1999년 LG가 지주회사로 전환할 때도 3년이 걸렸고, 수많은 계열사의 위치를 바꾸고 수많은 주주총회를 거쳐야 한다"고 말했다.

☞인적·물적 분할

기업을 분할하는 방식으로 인적분할과 물적분할이 있다. 기존 주주들이 신설되는 기업을 주식 비율 그대로 지배하면 인적 분할, 분할 회사간 100% 모회사, 자회사 관계가 되면 물적 분할이다. 원론적으로 인적 분할을 통해 존속 회사와 신설되는 회사는 법적으로 서로 '남남'이 된다. 반면 물적 분할은 신설 기업이 자회사로 되는 '모자(母子) 기업' 체제가 되면서 자회사의 손익이 모회사의 손익과 직결된다. 다만 자사주를 활용하면 인적분할 시에도 모자 기업 관계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