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대표적 부동산 개발 회사인 일레븐건설 엄석오(68) 회장을 28일 경기도 성남시 분당 본사에서 만났다. 엄 회장은 1세대 '디벨로퍼(developer)'다. 디벨로퍼는 주택단지나 도시를 개발할 때 땅을 사들이고, 기획·설계·마케팅까지 총괄하는 기업인을 말한다. 그의 사무실 양쪽 벽면은 '오늘의 한국 문학 33인선' '과학 대백과' 같은 전집류가 가득 찬 책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 보통 부동산 개발 회사 대표 사무실에 대형 지도가 붙어 있는 것과는 달랐다.

"젊은 시절 만든 책입니다. 출판사(양우당)를 20년 정도 운영하면서 내 나름대로 사명감을 갖고 책을 만들었는데, 제가 만든 책이 다 어디로 가버리고 집에도 없더군요. 요즘 헌책방을 뒤져 다시 사 모으고 있습니다. 부동산 개발 사업으로 기업을 키웠지만, 아직도 출판업을 했다는 데 자부심이 있습니다."

엄석오 일레븐건설 회장이 지난 28일 경기도 성남 본사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일레븐건설은 최근 경기도 용인 처인구 일대에서 초대형 복합 개발 사업을 용인시와 함께 추진 중이다.

전남 해남 출신인 그는 20대 시절 전집류 책을 파는 '북 세일즈맨'으로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했다. 책을 팔아 번 돈으로 출판사를 창업해 20~30권짜리 전집류 60여 종을 출판했다. 양우당은 1980년대만 해도 대형 출판사 중 하나였다. 하지만 출판업이 시들해지자, 그는 1991년 일레븐건설을 설립하고 건설업에 뛰어들었다. 엄 회장은 "출판해서 돈을 좀 벌어서 소형 건물을 짓기도 하고 임대하기도 했는데 이 노하우를 살려서 건설업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가 부동산 업계에 이름을 알린 대형 프로젝트는 1999년 분양했던 경기도 용인 신봉동 자이(3700가구)와 상현동 금호베스트빌(1~5차·2300여 가구)이다. 이어 서울 강동구에서 주상복합아파트(2004년), 용인 성복동에서 성복힐스테이트·성복자이 3600가구(2008년)를 분양하면서 대형 개발 회사로 성장했다. 그가 목숨 걸고 기획한 대형 프로젝트이지만, 주택 시장의 일반 고객들에겐 그저 대형 건설사가 지은 아파트로만 남아 있다. 그는 그런 점에 대해 "약간 섭섭한 면도 있다"고 말했다.

엄 회장은 "주택 사업의 주체는 당연히 디벨로퍼이고, 시공 회사는 사실 도급을 받아 공사만 하는 회사인데 유독 한국에서는 디벨로퍼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것 같다"며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디벨로퍼를 높게 평가해주고,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트럼프도 디벨로퍼 아니냐"고 말했다.

그는 부동산 개발업을 하면서도 어음을 쓰지 않고, 프로젝트 파이낸싱(PF)을 하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요즘은 부동산 개발 회사들이 땅값의 20~30%만 갖고 사업을 시작해 땅 매입 과정부터 시공사 보증으로 금융권 PF를 받아 사업을 진행한다. 시작부터 빚더미에서 시작하는 셈이다.

그는 "저는 현금 거래만 하고, 요즘 PF는 너무 복잡해서 어떻게 하는지도 잘 모른다"며 "내 돈 주고 땅을 사서 빚 없이 사업하는 게 속 편하다"고 말했다. 용인에서 대부분의 사업을 펼친 엄 회장은 "용인은 가격을 보나 입지를 보나 여전히 매력적인 주택 사업 지역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주택 시장 상황에 대해서도 낙관적이다. 엄 회장은 "특정 시기에 분양·입주 물량이 몰리는 것은 일시적 현상"이라며 "가구 규모가 줄고, 미혼·독신 가구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어 소형 주택 수요가 지속적으로 생기기라 본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용인 처인구 일대에서 초대형 복합 개발 사업을 추진하기로 하고 용인시와 협의하고 있다. 여의도 면적의 2.5배 정도 되는 부지(7.2㎢)에 주거·호텔·쇼핑·업무 시설 등을 지어 대규모 복합 도시를 건설하는 사업이다. 엄 회장은 "디벨로퍼로 쌓은 경험과 지식을 총동원해 필생의 사업이라고 생각하고 이번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며 "세계적 부동산 컨설팅 회사와 협업해 한국을 대표하는 비즈니스 도시를 건설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