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삼성전자는 반도체, 배터리, 디스플레이, 소재 등 전장(電裝) 부품 분야와 관련해 큰 경쟁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마트카 등 첨단 정보기술(IT) 기술이 요구되는 미래 자동차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서는 삼성과 같은 IT 기업과의 협력이 필수적인 시대가 올 것 입니다.”

지난 2012년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르노닛산그룹의 최고경영자(CEO)인 카를로스 곤(Carlos Ghosn) 회장을 이 만났다. 이 부회장은 35년이 넘도록 자동차 업계에서 일해온 곤 회장 앞에서도 자동차 산업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술술 얘기했다. 당시 전문적인 내용 지원하기 위해 박상진 삼성SDI 사장(현 박상진 삼성전자 대외담당 사장) 등 부품 계열사 대표·임원들도 배석했지만, 이 부회장의 상당한 내공(內功)에 할말을 잃었다. 현장에 동석한 전 삼성그룹 임원은 “이 부회장이 가진 자동차 산업의 이해도와 애정, 사업화 열정은 상상, 그 이상”이라고 평가했다.

이 부장이 전장사업을 삼성의 미래 성장동력으로 삼기 위해 승부수를 띄웠다. 미국 자동차 전장 부품 전문기업인 하만(Harman)을 80억 달러(약 9조3800억원)에 인수했다. 이는 국내 기업이 해외 기업을 인수하는 것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의 M&A다. 삼성전자의 미래 중 하나가 자동차 부품업체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전장사업팀을 신설하며 사업 추진을 위한 기초를 닦아왔다. 이번 인수·합병은 이재용 부회장의 등기이사 선임 이후 첫 대규모 합병이란 점에서 신성장 사업 가속 의지를 나타낸 것으로 평가된다. 커넥티드카, 자율주행차, 전기차 등 스마트카용 전장시장 규모는 연평균 13%씩 성장해 2025년 1864억 달러로 커질 것으로 추산된다. 이번 인수의 함의를 3가지로 정리했다.

① ‘음향 종합선물세트’ 하만은 어떤 회사?…탄탄한 영업망 ‘매력적’

1956년 미국 코네티컷에서 시드니 하만에 의해 설립된 하만은 커넥티드카용 인포테인먼트(Infotainment), 텔레매틱스(Telematics), 보안, OTA(Over The Air :무선통신을 이용한 SW 업그레이드) 솔루션 등의 전장사업 분야 글로벌 선두 기업이다. 매출이 70억 달러, 영업이익은 7억 달러(직전 12개월 기준)에 달한다.

하만은 JBL, 하만카돈(Harman Kardon), 마크레빈슨(Mark Levinson), AKG 등 프리미엄 오디오 브랜드를 보유하고 있다. 이외에도 카오디오에서는 뱅앤드올룹슨(B&O), 바우어앤윌킨스(B&W) 등의 브랜드를 보유하며 전세계 시장점유율 41%로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콘서트장이나 야구장 등에서 사용하는 음향 장비부터 가정용 제품, 자동차용 프리미엄 오디오 시스템 까지 음향과 관련된 토탈 솔루션을 제공하고 있다.

하만이 독일 프리미엄 자동차 브랜드 메르세데스 벤츠와 개발 중인 자동차 인포테인먼트 기술의 모습

프리미엄 오디오를 취급하는 하만카돈의 경우 국내 소비자들에게도 낯선 이름이 아니다. 삼성전자의 ‘아트PC’와 LG전자의 블루투스 헤드셋인 ‘톤 플러스’ 등에서 협업하며 뛰어난 성능으로 국내 인지도를 넓혀 왔다. 또 현대자동차는 준대형 세단 ‘제네시스’에 17개 스피커를 갖춘 하만의 ‘렉시콘’ 오디오 시스템을 도입해 지난 2014년 미국 음악 시상식인 ‘그래미 어워즈’에서 ‘테크니컬 그래미’상을 받았다.

하만 그룹이 본격적인 전장 부품 사업을 추진한 것은 1995년 독일의 전장 부품 회사인 베커를 인수하며 하만베커를 세운 뒤다. 하만베커는 지멘스, 보쉬, 델파이 등과 같이 대표적인 전장 회사다. 카오디오에서 다져온 영향력에 전장사업이 붙으면서 하만 그룹은 오디오 시장을 넘어 완성차 기업간거래(B2B) 시장에서 강자로 거듭나게 됐다.

실제 하만의 매출 중 65%가 전장사업에서 발생하고 있다. 특히 커넥티드카와 카오디오 사업은 연매출의 약 6배에 달하는 240억 달러 규모의 수주잔고를 보유하고 있을 정도로 자동차 전장 업계에서 경쟁력을 인정받고 있다는 평가다. 이미 메르세데스벤츠, BMW, 아우디, 폴크스바겐, 피아트, 도요타, 할리데이비슨 등 자동차, 모터사이클 제조사에 부품을 공급하고 있다.

하만이 보유한 브랜드(왼쪽)와 협력파트너사(오른쪽)의 로고

김기찬 가톨릭대 교수는 “하만은 커넥티드, 인포테인먼트, 음향 기술에 강한 기업으로 삼성전자의 전장 사업은 물론 스마트폰, 가전제품과의 시너지도 기대된다”며 “특히 하만은 수많은 자동차 브랜드와 거래를 하는 만큼 영업망이 절실한 삼성전자에 든든한 지원군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② 마그네티 마렐리 아닌 하만을 선택한 이유는?…삼성그룹과의 시너지

전문가들은 삼성전자의 하만 인수에 대해 ‘예상 밖의 결과’라고 평가한다. 그동안 삼성전자는 피아트크라이슬러(FCA)의 부품사업 자회사인 ‘마그네티 마렐리’를 인수하기하기 위해 협상을 진행해왔다. 최근에는 프랑스 음향 전문기업 ‘포칼(Focal)’의 인수가 마무리 단계에 와있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가 인수를 위해 두 회사를 접촉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인수협상 과정에서 가격조율과 M&A 시너지 부분에서 이견을 좁히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마그네티 마렐리 홈페이지 화면

시장에서는 삼성전자의 마그네티 마렐리 인수에 대해 가능성이 큰 시나리오로 점쳤다. 이 부회장이 2012년부터 피아트크라이슬러 지주사인 엑소르의 사외이사를 맡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5월에는 엑소르그룹 이사회에서 존 엘칸 회장을 만나 협력을 논의하기도 했다. 마그네티 마렐리는 FCA가 지분 100%를 보유한 부품업체로, 지난해 매출액은 72억6000만 유로(약 9조157억원)에 달한다.

삼성그룹 고위 임원은 “마그네티 마렐리 인수와 관련해 이미 4~5년전부터 준비해왔다”며 “워낙 제품군이 많고 미래 신기술보다는 현재의 전장사업에 초점이 맞춰진 만큼 M&A 이후 삼성전자와의 시너지가 떨어져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가 나쁠 것으로 판단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마그네티 마렐리는 자동차 조명, 파워트레인, 전자시스템, 서스펜션, 배기, 플라스틱 부품·모듈 등 자동차 전장과 관련된 대부분의 부품을 공급하고 있다. 삼성전자의 경우 반도체, 디스플레이, 배터리를 기반해 전장 사업을 추진하는 만큼 내연기관과 관련된 사업들은 시너지가 날 수 없는 요소들이다.

자동차 제조사들의 비용절감 움직임도 마그네티 마렐리의 인수합병 걸림돌로 작용했다. 제너럴모터스(GM)은 기존 26개의 플랫폼(뼈대)을 4개로 축소할 예정이며, 포드도 플랫폼 통합으로 비용 절감을 계획 중이다. 도요타는 2018년 전차 종 적용을 목표로 TNGA(Toyota New Global Architecture) 전략을 추진 중이다. TNGA는 원가절감을 위한 부품 공용화, 플랫폼 통합, 부품사 대상 가격인하 등을 골자로 하고 있다. 제조사의 원가절감 활동은 부품업계 입장에서 수익률 악화로 이어질 수 있다.

김필수 대림대학 자동차과 교수는 “마그네티 마렐리는 전통적인 자동차 부품업체로서 미래 기술보다는 현재 내연기관차량에 탑재되는 부품공급 비중이 높은 기업”이라며 “특히 현대차와 현대모비스의 관계처럼 마렐리 역시 피아트크라이슬러그룹의 자회사이기 때문에 다양한 자동차 브랜드와 협력하는데 지분 구조상 근본적인 한계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③ 이재용, 삼성그룹 車전장사업 수직계열화 ‘야심’

전문가들은 삼성전자가 하만을 선택한 배경에 대해 ‘수직계열화’가 가능하다는 점을 꼽는다. 수직계열화는 기업이 생산하는 제품의 생산부터 판매까지 공급사슬을 계열사로 구성하는 것을 말한다. 현대차가 현대모비스(부품공급), 현대제철(철), 현대글로비스(운송) 등의 자회사를 두는 것과 마찬가지다.

수직계열화는 원가 절감과 안정된 부품공급, 신기술을 빠르게 도입할 수 있다는 강점을 가지고 있다. 또 세트 제품의 판매가 잘 될수록 부품의 판매도 늘기 때문에 기업의 실적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현재 하만은 자동차 인포테인먼트, 카오디오 등 전장사업과 함께 소비자 오디오, B2B음향, 기업용 소프트웨어(SW) 서비스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러한 사업군에는 삼성그룹의 공급하는 반도체, 디스플레이, 배터리 등이 모두 사용될 수 있다.

또 삼성전자는 스마트폰, 가전에도 하만의 프리미엄 기술을 도입하기 쉬워졌다. 최근 LG전자가 V20에 쿼드DAC를 탑재해 음향을 강조한 만큼, 갤럭시S8나 갤럭시노트8(가칭)에는 하만의 기술력이 녹아들 수 있다는 의미다. TV나 오디오 사업도 하만의 스피커와 음향 솔루션이 결합될 경우 프리미엄 이미지를 얻을 수 있다.

수직계열화에도 단점은 있다. 완성제품의 판매가 부진할 경우 부품을 공급하는 계열사도 연쇄적으로 치명타를 입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장부품을 비롯해 스마트폰, 가전 등의 완제품의 종류가 다양한 만큼 어느정도의 리스크 분산이 가능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하만의 높은 영업이익률도 삼성전자에는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올해 2분기까지 하만의 영업이익은 6억8000만달러로 2015년(5억5000만달러)보다 24% 증가했다. 영업이익률은 무려 9.8%에 달한다. 오는 2017년 1분기에는 영업이익률이 10% 넘어설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