퀄컴과 NXP의 '빅딜' 이후 일본 르네사스(Renesas)도 몸집을 키우며 반격을 준비하고 있다. 자율주행차 광풍과 함께 급성장하는 차량용 반도체 시장이 미국과 일본 기업 중심으로 양강 구도를 형성하는 모양새다.

11일 업계에 따르면 르네사스는 세계 최대 자동차 부품사 중 하나인 보쉬 그룹의 에스크립트(ESCRYPT)와 자동차용 부품과 소프트웨어 플랫폼을 공동 개발한다는 내용의 협약을 체결했다. 에스크립트는 인터넷 공격, 해킹을 막을 수 있는 차량용 소프트웨어와 반도체 기술에 특화한 회사로 알려져 있다. 이 기술은 최근 퀄컴이 인수한 NXP의 전문 영역이기도 하다.

르네사스는 히타치제작소, 미쓰비시전기의 반도체 부분을 분사해 만든 르네사스테크놀로지와 NEC일렉트로닉스가 통합해 2010년 출범했다. 2011년 동일본대지진으로 경영위기에 빠졌지만, 민관펀드인 산업혁신기구와 도요타자동차 등의 출자와 대규모 구조조정을 거쳐 2014년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르네사스의 자동차용 반도체 이미지.

이번 르네사스와 에스크립트의 제휴는 NXP 인수와 함께 세계 최대의 차량용 반도체 업체로 뛰어오른 퀄컴을 견제하려는 조처로 보인다. 퀄컴은 NXP 인수와 함께 자동차의 두뇌에 해당하는 마이크로컨트롤러유닛(MCU)부터 통신·네트워크용 칩, 보안용 칩 등 해당 시장에서 가장 넓은 포트폴리오를 확보하게 됐다.

이에 대항해 르네사스는 좀 더 자동차에 특화된 '정통주의' 노선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보쉬 그룹의 경우 자동차 업계에서 가장 오래된 전장 부품 기업 중 하나이며, 자회사인 에스크립트 역시 자동차 전용 보안 솔루션에 특화한 기업이다.

르네사스의 한 관계자는 "퀄컴, NXP, 엔비디아, 삼성전자 등이 생산하고 있는 자동차용 반도체는 기존의 모바일 기기에 사용되던 칩을 자동차용으로 일부 설계를 수정한 것뿐"이라며 "르네사스는 십수 년 동안 미래형 자동차 전용 칩을 설계해 왔다"고 설명했다.

이에 앞서 르네사스는 미국의 전기차용 반도체 기업 인터실을 32억달러(약 3조5000억원)에 인수하기로 하기로 합의한 바 있다. 세계 차량용 반도체 시장 점유율이 40%에 달하는 르네사스는 인터실 인수를 통해 자율주행차나 전기차 등의 엔진 전자제어에 특화한 반도체 생산에 박차를 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차량용 반도체 시장 탈환을 겨냥한 행보다.

세계 차량용 반도체 시장 1위인 퀄컴·NXP와 2위인 일본의 르네사스가 지속적으로 몸집 불리기 나서면서 전장용 반도체를 차세대 사업으로 선언한 삼성전자, SK하이닉스는 계속해서 변방으로 밀리는 모양세다.

경쟁사들이 자동차용 MCU, DSP와 이미지센서, 레이더센서 등으로 제품 포트폴리오를 늘려나가고 있는 가운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여전히 자동차용 D램과 플래시 메모리 제품 일부를 공급하는 데 그치고 있다. 자동차용 D램 시장에서는 미국의 마이크론이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유력 자동차 부품업체와의 협업 속도도 나지 않아 두 회사가 애를 태우고 있다. 삼성전자의 경우 피아트크라이슬러(FCA)의 부품 자회사인 마그네티를 인수하기 위해 협상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연내 성사가 어려울 전망이다. 이 회사의 모그룹인 FCA가 마그네티 마렐리를 매각하는 대신 기업공개(IPO)를 추진할 것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SK하이닉스 역시 유럽 내 전장 부품 사업 강화를 위해 이 회사와 협상을 벌이기도 했지만 이렇다 할 성과가 없는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