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의 원산지는 에티오피아의 산악지대이지만, 서기 575년경 예멘의 메카 지역에서 처음으로 식물로서 재배되기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때부터 커피는 약 1000년 동안 메카를 떠나지 않고 메카 지역에서만 재배되었다.

1500년대 중반 오스만투르크가 예멘을 점령한 이후 커피는 오스만투르크의 영토 확장에 따라 먼 지역까지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오스만투르크는 커피의 경제적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예멘 이외의 지역에서 커피를 재배하는 것을 철저하게 막았다. 커피 생콩은 반드시 물에 넣어 끓이거나 열을 가해서 발아능력을 없앤 후에만 외부로 반출이 허용되었다. 위반하면 사형까지 처해졌다고 한다.

당시 메카의 산악지대에서 수확된 커피는 모카항으로 수집되었다. 이후 뱃길로 수에즈까지 운송된 다음 다시 낙타에 실려 알렉산드리아의 창고로 보내졌다. 그 곳에서 베니스의 상인들을 통해 프랑스 등 유럽 여러 곳으로 팔려 나갔다. 한때 모카라는 이름이 커피의 대명사로 불려졌던 이유는 이러한 연유에서다.

커피를 뜨거운 음료로 마시기 시작한 것은 서기 1000년에서 1300년 사이로 알려져 있다. 그 전에는 씨앗을 빻아 동물성 지방과 함께 섞어 동그랗게 음식으로 만들어 긴 도보여행이나 전투할 때 기력 회복용으로 먹었다고 한다. 처음에 커피는 마실거리보다는 주로 약으로 인정 받았다. 그러나 커피의 진정작용과 기분을 북돋우는 효과로 인해 커피는 곧 음료 자체로서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독점유지를 위한 오스만투르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커피는 커피 벨트(Coffee belt) 또는 커피 존(Coffee zone)이라 불리는 남북회귀선의 25°사이에 위치한 세계의 모든 지역에서 재배되고 있다. 메카 지역을 벗어나 세계로 퍼져 재배되기 시작한 지 불과 300년도 채 안된 짧은 기간 동안 커피 나무는 생장가능한 지구상의 모든 지역을 점령한 것이다.

그 이면에는 대항해시대의 도래, 제국주의 팽창, 노예노동과 폭력 등의 아픈 과거와 함께 문익점의 목화씨 같은 흥미진진한 이야기도 섞여 있다.

커피의 인기가 높아질수록 커피나무를 노리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기록에 의하면, 1600년경 인도에서 온 바바부딘이라는 이슬람 순례자가 예멘에서 발아가능한 커피 씨 7개를 훔쳐 자신의 배꼽에 동여맨 채 인도로 돌아가서 인도 남부지역의 마이소르 산악지대에서 경작하는데 성공하였다고 한다.

또 1616년, 당시 세계 해상무역을 장악하고 있던 네덜란드인들은 산업스파이까지 동원하여 커피나무 한 그루를 나무째 온전히 훔쳐 예멘의 아덴항에서 싣고 네덜란드로 달아났다. 그렇게 훔친 커피나무를 암스테르담의 식물원에서 배양하여 그 후손을 당시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실론과 자바에 옮겨 심음으로써 수마트라, 셀레베스, 티모르, 발리 등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의 섬 지역에서도 커피를 재배하게 되었다.

그 뒤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커피 생산량에 따라 세계 시장의 커피 가격이 좌지우지 되었다. 1700년대에는 모카와 자바가 가장 유명하면서도 인기 있는 커피로 떠올랐지만 곧 모카는 커피 시장에서 경쟁력을 잃고 세계 커피 시장에서 사라졌다. 오늘날 세계 최고 품질의 차 생산지의 하나로 알려진 실론은 1850년대까지만 해도 세계적인 커피 생산지였다. 하지만 1869년 실론섬에 커피녹병이 발병하여 10년 사이 커피 수확량의 3/4이 줄어들 정도로 초토화 되었다. 그 후 실론은 커피 재배 대신 차를 생산하게 되었다.

커피는 1723년 아메리카 대륙 카리브해의 섬나라로 건너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커피가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간 역사에는 영웅적인 이야기가 함께 하고 있다.

서인도제도 동쪽의 소앤틸리스 제도에 프랑스령 마르티니크라는 작은 화산섬이 있다. 이 섬에 주둔하고 있던 가브리엘 마티외 데클리외(Gabriel Marthieu Desclieux)라는 프랑스 장교는 마르티니크가 네덜란드령 동인도와 자연환경이 유사한데도 커피가 자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서 그 섬에서 커피를 재배해보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커피 묘목이나 씨앗을 얻을 수 없었다. 당시 네덜란드는 커피 나무나 발아 가능한 씨앗의 외부 반출을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파리의 식물원에는 1714년 암스테르담 시장이 루이 14세에게 선물로 바친 커피나무를 육종하여 온실에서 재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데클리외가 몇 년 동안 애원했음에도 식물원은 커피나무의 곁가지 한 개도 데클리외에게 나누어 주지 않았다. 그러던 중 데클리외는 마침내 1723년, 루이 14세의 주치의의 도움으로 커피나무 한 그루를 얻어 반출허가를 받았다.

데클리외는 곧바로 대서양을 건너 마르티니크에 그 커피나무를 심었다. 몇 년 후 마르티니크 섬에는 400만주의 커피 나무가 자라고 있었다고 한다. 대서양을 건너는 동안 데클리외는 커피나무를 노리는 승객의 위협과 폭풍우와 해적의 위험에서도 커피나무를 지켜냈다. 또 열대무풍지대에 갇혀 한달 동안 배가 움직이지 않을 때도 자신이 마실 물까지 커피나무에 줘 가면서 애지중지 커피나무를 지켰다고 한다. 그 이후 데클리외는 앤틸리스 제도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브라질에 커피가 도입된 역사에도 극적인 뒷이야기가 있다. 1723년 커피가 아메리카대륙으로 이주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네덜란드와 프랑스도 오늘날의 수리남 지역인 가이아나 지역에서 커피를 재배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가이아나는 네덜란드령과 프랑스령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당시 가이아나 지역의 네덜란드 총독과 프랑스 총독 역시 커피나무는 물론이고 발아 가능한 커피 씨앗을 반출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했다. 위반하는 경우 사형에 처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프랑스령 가이아나와 네덜란드령 가이아나 사이에 국경 분쟁이 발생하였다. 두 나라의 총독은 분쟁해결을 위한 중재자로 중립적 입장이던 포르투갈령 브라질의 장교 프란시스코 데 멜로 팔레타(Francisco de Melo Palheta)에게 중재를 요청했다.

당시 커피 씨앗을 얻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있던 팔레타는 곧바로 중재요청을 수락하고 가이아나로 달려갔다. 팔레타는 곧 절충안을 내놓아 국경문제를 성공적으로 중재하였다. 팔레타는 중재도 중재려니와 커피 씨앗을 얻는데 모든 관심을 쏟았다.

팔레타가 임무를 마치고 브라질로 돌아갈 때 이미 그에게 유혹당한 프랑스 총독의 부인은 커다란 꽃다발을 선물로 주면서 총독 몰래 그 속에 커피 씨앗 한 움큼을 집어 넣었다. 그 날 이후 브라질은 오늘날 세계 커피시장을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커피 나무가 예멘을 떠나 실론과 인도네시아로, 다시 남아메리카로 이식되면서 서구열강의 식민지 원주민과 아프리카에서 대서양을 건너 팔려온 노예들에게는 질곡의 삶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쉴새없이 가파른 언덕을 오르내리면서 커피 나무의 가지치기를 하고 거름을 주었으며 오로지 살아남기 위하여 뙤약볕 아래에서 커피 열매를 땄다. 영화 ‘마션’의 마크 와트니의 표현을 빌리면 이들이야 말로 진정한 커피 농장의 주인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와트니는 영화에서 감자를 심으며 “땅을 경작하는 자가 바로 그 땅의 주인이다”라는 말을 했다. 그러나 지구에서의 현실은 화성과는 너무나 달랐다.

커피는 식민제국주의에 의해 예멘 지역에서 세계 전역으로 재배지가 확산되었다. 커피의 세계적 확산과 더불어 식민지 노예들의 비참한 삶이 심화된 커피의 역사를 생각하면 커피는 ‘지상 최고의 맛’이 아니라 가히 ‘악마의 음료’라고 불릴만 하다.

하지만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혼자서 공원을 산책하거나 회의 중 또는 운전 중, 어떤 종류의 만남에서든 사람과 어울릴 때, 언제 어디서나 환영받는 음료는 커피 밖에 없다.

오늘날 우리가 여유롭게 마시고 있는 커피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농촌지역 사람들의 삶과 직결되어 있다. 최근 들어 소비자들이 커피 뒤에 숨은 환경문제와 노동문제 등에 점점 신경쓰고 원산지와 커피 품종을 까다롭게 따지게 되면서 ‘유기농커피’, ‘공정무역커피’, ‘조류친화적(bird-friendly)커피’ 등 ‘지속가능한 커피’ 열풍이 불고 있다. 이러한 운동으로 인해 커피 농민들의 삶 또한 조금씩 개선되고 있다. 비로소 커피는 ‘악마의 음료’라는 오명을 벗어 던지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