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환 한화생명 보험연구소장·고려대 국제대학원 겸임교수

중국 위안화가 지난 10월 1일부터 국제통화기금(IMF)의 특별인출권(SDR)을 구성하는 통화에 정식 편입됐습니다. 특별인출권, 즉 SDR(Special Drawing Rights)은 IMF 회원국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했을 때 담보 없이도 인출할 수 있는 가상 통화를 말합니다. 이전까지는 미국 달러, 유로존의 유로, 영국 파운드, 일본 엔화 등 4개 통화가 바스켓을 구성했는데 이번에 위안화가 새롭게 들어간 것입니다. 이에 따라 중국이 경제굴기(經濟崛起)에 이어 통화굴기 또는 금융굴기의 교두보를 만들면서 위안화가 조만간 미국 달러에 버금가는 세계의 기축통화로 발돋움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습니다. 어떤 통화를 기축통화라고 부르는 것이며 기축통화의 역사는 어떻게 흘러왔는지 알아보겠습니다.

기축통화국은 외환 위기를 겪지 않아

"대외 부채가 아무리 많아도 절대로 외환 위기를 겪지 않을 나라가 지구상에 딱 한 나라가 있다. 어느 나라일까요?" 1997년 말 우리나라가 한창 외환 위기를 겪고 있을 때 워싱턴에서 열린 한 세미나에서 필자가 던진 질문입니다. 당시 세미나에선 일부 참가자가 "잘나가던 한국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외환 위기를 겪는 나라가 되었냐"며 한국은행 워싱턴사무소에서 근무하는 필자를 겨냥해 목소리를 높이는 바람에 분위기가 격앙되었습니다. 코너에 몰린 필자가 궁여지책 내놓은 항변이었지요. 미국인이 대부분이었던 참가자들의 입에서 스스로 '미국'이라는 대답이 나오면서 세미나 분위기가 순식간에 차분해졌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미국이 절대로 외환 위기를 겪지 않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달러화는 세계 어느 곳에서나 통용될 뿐 아니라 누구나 선호하는 통화이므로 필요할 경우 찍어내면 되기 때문입니다. 달러화는 미국 제1의 수출품으로 100달러 지폐의 60% 이상이 미국 외에서 통용되고 있다는데요, 달러화가 국제적으로 '가치 저장, 교환 수단, 회계 단위'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달러화를 기축통화라고 부르는데요, 기축통화(基軸通貨·Key Currency)는 말 그대로 전 세계 수많은 통화 중에서도 가장 기본 또는 기준이 되는 통화를 의미합니다. 달리 말하면 국제 간 결제나 금융거래 때 거리낌없이 서로 주고받는 통화를 말합니다. 그래서 원유와 금은 물론 구리, 쌀, 옥수수 등 원자재의 국제 거래 가격은 달러로만 표시되고 있습니다.

세계 최초 기축통화는 로마의 '데나리우스'

현재는 미국 달러화가 세계 제1의 기축통화 역할을 하고 있지만 이전에도 기축통화는 시대별로 여럿 있었습니다. 옛날에도 국가(지역) 간 무역을 하기 위해서는 기준이 되는 통화가 필요했기 때문이지요. 세계 최초 기축통화는 2000년 전 로마의 통화였던 데나리우스로 보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이탈리아는 물론 멀리 영국까지 포함한 남유럽과 터키, 이집트 등 지중해를 내해(內海)로 두고 있던 대제국 로마가 발행한 은화(銀貨) 데나리우스는 활발한 무역을 가능케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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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이 동·서로 분열된 뒤에는 동로마제국이 발행한 금화(金貨) 솔리두스가 기축통화 역할을 이어받았습니다. 대제국 로마가 힘을 잃는 가운데 데나리우스의 은(銀) 함유량이 크게 떨어지면서 통화로서 지위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베잔트라고도 불리던 솔리두스는 십자군이 동로마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는 13세기까지 기축통화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솔리두스 이후에는 뚜렷한 기축통화가 눈에 띄지 않습니다. 이슬람 국가들 사이에서는 금화 디나르가 통용되었고 유럽 대륙에서는 제각기 금화를 만들어 유통시키기 시작했습니다. 베네치아의 금화 두카트, 피렌체의 금화 플로린 등이 대표적인데요, 15~16세기 유럽에서 통용되던 통화가 무려 40종이 넘었다고 하니까 그야말로 '기축통화의 춘추전국시대'였던 셈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볼 부분은 기축통화는 로마제국과 같은 초강대국이 발행해야 경제력과 신용을 바탕으로 더 넓은 지역에서 통용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英 파운드는 2차 대전 후 달러에 패권 넘겨

그다음으로 기축통화를 발행한 초강대국은 어느 나라였을까요? 신대륙 발견 이후 스페인이 잠시 강대국으로 일어서지만 곧 대영제국에 밀리면서 영국의 파운드화가 기축통화로 올라섭니다. 특히 영국은 18세기 초중반부터 산업혁명에 앞서면서 세계경제를 주도하는 동시에 영토에서도 해가 지지 않는 초강대국의 위치를 차지하게 됩니다. 영국의 통화인 파운드화 역시 자연스럽게 기축통화 지위를 얻게 되지요.

그러던 파운드화도 영국이 1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힘을 잃기 시작하자 미국의 달러에 기축통화 역할을 넘겨주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파운드화는 물러가고 그 자리를 미국의 달러가 차지한 이후 지금까지 독보적인 기축통화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달러화의 위상이 항상 높았던 것은 아닙니다. 1970년대 초반에는 베트남 전쟁과 냉전 비용의 과다 지출에다 유럽 경제의 부활로, 1980년대 중반에는 과도한 무역수지 적자와 일본 경제의 부상으로 기축통화 지위를 위협받기도 했습니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때엔 미국이 위기의 진원지인 데다 국가 신용등급까지 강등당하는 등 기축통화국 체면을 크게 구기기도 했습니다. 최근 들어서는 미국 경제가 상대적 강세를 이어가는 가운데 셰일 원유 개발과 공급으로 에너지 시장에서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면서 다시 기축통화로서 위상을 되찾는 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분간 기축통화 '달러' 독주는 계속될 듯

하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엔 달러를 기축통화로 하는 국제통화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습니다. 당시 중국은 미국을 겨냥, 특정 국가의 통화가 아니라 SDR과 같은 초국가적 준비통화(Super-sovereign reserve currency)를 기축통화로 채택하자고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SDR은 장부상으로만 존재하는 가상 통화여서 아직까진 그 유용성이 낮습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비트코인(Bitcoin)과 같은 디지털 가상 화폐가 새로운 기축통화가 될 것이라는 목소리도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비트코인이 국제적으로 통용되기 위해서는 먼저 통화로서의 기본 조건인 '가치 저장, 교환 수단, 회계 단위'로서 역할을 충족해야 하므로 아직은 갈 길이 멀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앞으로도 달러화의 기축통화 독주 체제가 이어지는 가운데 유로, 엔화에 이어 위안화가 도전하는 모양새가 이어질 것입니다. 반면 파운드화의 경우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로 기축통화로서 역할이 더 위축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기축통화

기축통화(基軸通貨·Key Currency)는 국제 무역 거래나 금융 거래를 할 때 기본으로 통용되는 화폐를 가리킨다. 2차 대전 후에 미국 달러가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제1 기축통화 지위에 올랐고, 유로화와 일본 엔화가 제2, 제3 기축통화로서 보조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기축통화를 발행하지 못하는 나라는 항상 외환 위기 등에 대비해 달러 같은 기축통화를 외환보유액으로 쌓아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