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세 이상 여성 다섯 명 중 한 명은 과민성 방광 증후군으로 화장실을 수시로 들락거린다. 뇌가 시도 때도 없이 방광을 수축시키는 신경 신호를 보내기 때문이다. 원인은 아직 모른다. 치료제가 있지만 변비 등의 부작용으로 약을 제대로 복용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 여성들의 불안감을 해소시켜줄 약이 개발됐다. 지난달 영국 런던대 병원은 이스라엘 블루윈드 메디컬이 개발한 신약을 과민성 방광 증후군 환자에게 임상 시험했더니 화장실을 가는 횟수가 절반 이하로 줄었다고 밝혔다. 눈길을 끄는 것은 이 약이 먹는 알약도, 주사제도 아니라는 것. 발목 안쪽 신경에 이식하는 전기 자극 장치다.

제약산업이 IT(정보기술) 산업과 만나 새로운 진화를 하고 있다. 신경에 전기 자극을 줘 질병을 치료하는 '전자약(electroceuticals)'이 기존 치료제를 대체하기 시작한 것이다. 전자약은 과민성 방광 증후군 같은 생활의 불편을 없애는 데에서부터 간질과 류머티즘 관절염, 장염, 천식 같은 만성질환과 심지어 암과 파킨슨병, 알츠하이머 치매 등 난치병에까지 도전하고 있다.

과민성 방광에서 치매 치료까지 도전

뇌는 인체 모든 곳으로 전기신호를 보내 생명 활동을 조절한다. 여기에 이상이 생기면 병이 난다. 전자약은 통신의 잡음을 바로잡듯 잘못된 신경 신호를 교정해 치료 효과를 낸다. 블루윈드의 신경 자극 장치는 국소마취를 통해 15분 만에 발목에 있는 신경에 이식한다. 이곳을 자극하면 방광을 수축시키는 신호를 막을 수 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그래픽 뉴스로 크게 볼 수 있습니다.

기존의 화학합성 의약품이나 바이오 의약품은 병을 유발하는 물질과 결합해 치료 효과를 낸다. 하지만 이 의약품들은 원치 않은 다른 곳에도 결합해 부작용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았다. 전자약은 꼭 필요한 신경에만 전기신호를 보내기 때문에 그런 우려가 없다.

특히 전자약은 한 번 이식만으로 매일 약을 먹는 불편을 없앨 수 있다. 지난해 미국의학협회 저널에 실린 논문에 따르면 매일 5가지 이상 약을 먹는 사람이 2000년 8%에서 2012년 15%로 거의 배로 늘었다. 전자약은 약을 제대로 복용하지 않아서 병이 더 악화되는 일을 막을 수 있다.

미국, 유럽에서 허가 잇따라

전자약은 넓은 의미에서 전기 자극을 가하는 심장박동기나 인공 달팽이관까지도 포함한다. 하지만 요즘 전자약은 그보다 훨씬 작고 신경에 직접 전기신호를 보내는 장치를 일컫는 경우가 많다. 이런 신세대 전자약들이 최근 잇따라 식품의약국(FDA) 승인을 받았다.

미국 엔테로메딕스는 병적인 비만을 치료하는 전자약을 개발해 2015년 FDA 허가를 받았다. 위에 있는 신경에 전기신호를 보내 포만감을 유도하는 원리다. 인스파이어 메디컬 시스템스는 기도(氣道)의 신경을 자극해 수면 무호흡증을 치료하는 전자약을 개발했다. 2014년 FDA의 승인을 받았으며, 지난 8월까지 1000건 이상의 이식 수술에 성공했다. 20년 전 FDA 허가를 받은 사이베로닉스의 간질 치료 전자약은 최근 우울증 치료제로 재탄생했다. 간질 치료 과정에서 환자들의 행복감이 높아지는 '좋은 부작용'이 관찰됐기 때문이다.

뇌를 직접 자극하는 전자약도 있다. 미국 오하이오주립대 연구진은 뇌에 칩을 이식해 사지마비 환자가 손을 움직이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마비 환자가 생각만으로 로봇 팔을 움직인 적은 있지만 자신의 마비된 손을 다시 움직인 것은 처음이었다. 백선하 서울대 의대 교수는 "국내외에서 뇌 깊숙한 곳에 전극을 심고 전기 자극을 줘 파킨슨병이나 알츠하이머 환자 치료에 큰 효과를 보고 있다"고 말했다. 백 교수는 국산 뇌 심부(深部) 자극기를 개발했다.

인터넷 기업과 제약사의 협력도

전자약의 성공 사례가 늘면서 개발 주역들이 바이오 벤처에서 글로벌 기업으로 옮겨갔다. 지난 8월 세계 최대의 인터넷 기업인 구글은 세계 7위 제약사인 영국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과 전자약 전문 기업인 갈바니 바이오일렉트로닉스를 설립했다. 회사 이름은 전기 자극으로 개구리 다리를 움직이게 한 실험으로 유명한 18세기 이탈리아 과학자 갈바니의 이름을 딴 것이다. 구글과 GSK는 5년간 갈바니에 7억달러를 투자해 새로운 전자약을 개발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출시 예정인 첫 제품은 류머티즘 관절염 치료제가 유력하다.

GSK는 이미 미국 파인스타인 의학연구소의 케빈 트레이시 박사와 함께 류머티즘 관절염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다. 트레이시 박사는 전자약 상용화를 위해 2007년 셋포인트 메디컬이라는 회사를 세웠다. 트레이시 박사는 지난 7월 류머티즘 관절염 환자 17명에게 전자약을 이식해 12명에게서 치료 효과를 봤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셋포인트의 류머티즘 관절염 전자약은 과도한 면역반응을 억제하는 원리다.

이런 면역반응 억제 원리는 면역반응이 지나쳐 생기는 심각한 장염인 크론병이나 천식 같은 다른 질병 치료에도 쓸 수 있다. 실제로 구글·GSK의 합작 회사인 갈바니는 내년부터 3가지 만성 질환에 대한 전자약의 임상 시험을 시작하기로 했다. GSK의 전자약 부문 부회장인 크리스토퍼 팸은 지난 3월 월스트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의료에서 전자약의 가치는 애플이 휴대전화에 미친 영향에 비교할 수 있다"고 말했다.

소형화와 정밀도 향상 등이 과제

전자약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려면 아직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있다. 우선 뇌에서 특정 신호를 보내는 신경이 어디인지 정확히 밝혀내야 한다. 즉 전자약의 정밀도를 높여야 한다는 말이다. 이는 뇌 과학이 맡아야 한다. 백선하 서울대 의대 교수는 "뇌 심부 자극을 위해서는 초고해상도 뇌 영상 기술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전기 자극 장치의 소형화도 필요하다. 이를 위해선 배터리 없이 작동하거나 외부에서 무선으로 전기를 공급받는 초소형 장치가 필요하다. 이는 전자공학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또 의사가 인터넷으로 환자의 몸에 이식한 장치가 보낸 신호를 보고 적절한 처방을 내리려면 통신 기술의 발전도 필요하다. 몬세프 슬라우이 GSK 백신 부문 회장은 "전자약을 이식하는 로봇 수술 시스템 개발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GSK와 구글이 손을 잡은 것도 이처럼 전자약의 개발을 위해서는 뇌 과학과 생명과학, 전자공학, 인터넷, 통신 기술의 융합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전자약(electroceuticals)

인체에 이식하는 치료용 전자장치. 전자공학(electronics)과 약(pharmaceutical)의 영어 합성어이다. 생명전자약(bioelectronic medicine)이라고도 한다.